얼마 전 그가 보낸 편지에서 이슬아 작가의 글을 구독한 적이 있다고 썼다. 하지만 답장을 한 적은 없노라고도 썼다. 출판사 오너가 유료 구독을 할 정도의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그녀는 젊고 단단한 글의 토양에 서있는 사람 같았다. 내가 밟아본 적 없는 이국의 모래 먼지 위에서든, 푸슬거리는 텃밭에서든 묵묵히 하루를 일구는 자. 여러 스승들에게 글쓰기 수업을 받았다는 말에 글쓰기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나의 단출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은, 곽, 옥 그리고 어딘.
스승의 이름 대신 성을 또렷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의 발자취는 이미 사람을 향해 있었다.
종일 끙끙대며 쓰고 다듬는 글에서 맘에 드는 한 문장을 건지는 날이면, 나는 뿌듯했노라 쓴 적이 있다.
아침 모래해변을 걸으며 반짝이는 것을 찾아 마구 뛰어다니고 있던 나를 떠올린다. 눈부심에 이끌려 달려가 움켜 잡으면 빛나던 것은 금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말았다. 저 멀리서 뿜어지는 은빛을 향해 얼마나 달려가기를 반복하며 기진맥진했던가. 가까워질수록 저곳은 이곳이 되고, 빛은 차례로 사그라들었다.
지쳐 해변에 앉아 있으면 모래가 발바닥에 들러붙는다. 파도가 한 번 지나갈 때마다 그것들은 씻기고, 다시 묻는다. 반짝임보다 오래 따라붙는 것은 늘 발에 붙은 사소한 것들이다.
이제는 알 듯도 하다. 눈부시게 나를 불러들였던 것도, 자주 나를 들썩이게 했던 것도 바다가 빛과 어울린 순간의 그저 사소한 일상이었다. 바다가 빛의 비늘처럼 일렁일 때, 모래의 영혼들이 잠시 고개를 든다.
그가 구독료를 지불하면서까지 놓지 않으려 했던 것은 뉴스에 나올법한 희귀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해서 지나쳐버린 일상에 달라붙은 불편함 같은 것들. 신발 속에 들어간 작은 모래알이나 설거지 뒤에도 남는 기름막처럼, 지워지지 않는 감각들. 익숙하고 낯설면서도 찜찜한 것들이었다.
생선을 먹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촘촘히 박힌 생선 가시를 발라내는 것이 귀찮아 먹지 않는다 했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잠시 걸렸다. 그래서인지 손이 더디게 움직였다.
그날 저녁, 생선을 구웠다. 공들여 불을 보고 가시를 바르는 동안 글살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제야 생선 한 마리를 온전히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의 손가락에서 글이 흘러나온다.
이제는 반짝임보다 발바닥을 간질이는 감각을 따라 걷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