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에 남은 발자국

by 이채이

그해 겨울, 나는 목포행 야간 기차를 탔다. 시를 쓰고 싶었던 나이였다. 시의 재료를 모으고 싶었다.

유리창에 낀 결로에 주먹을 쥐어 도장을 찍고, 검지로 발가락 자리 다섯 곳에 점을 찍었다. 눈 위에 찍힌 맨발바닥처럼 보였다. 한 걸음 내디뎠다.

입안의 김을 모아 유리창에 불어넣고 발도장을 또 새겼다. 검어진 밤과 밤을 달리는 기차의 유리에는 흐릿한 이슬이 자꾸만 번지고 있었다. 그 안갯속으로 나는 자꾸만 발자국을 찍어댔다.


마주 보는 앞자리에는 신부님이 앉아 있었다. 검은 옷깃이 밤보다 단정했다.

그의 눈에 나는 낯선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는 겁 없는 아이로 보였던 것일까.

글에 목마르고 시가 고픈 학생으로 보였을까.

안갯속에 발자국을 찍어대는 탐험가로 보였을까.

어른의 눈에 비친 나는, 가출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었다.


메모장에 단어를 몇 개 건져 적었던 것도 같고,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었던 것도 같다.

기억하지 않으면 흐려지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새벽 역에 부려지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그런 현실적인 고민도 했던 것 같다.

잡념은 몰아치는 추위와 기차 안의 열기 사이에서, 유리창에 물방울로 맺혀가고 있었다.


목포의 새벽에 도착했다. 불 꺼진 도시로 이어진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그때 바람이 들이치는 길에서 ‘그 겨울의 찻집’을 흥얼거렸다. 기억나지 않는 가사와 되풀이되는 멜로디만으로도 얼마든지 이어 부를 수 있는 엉터리 곡이었다. 기차에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눈 신부님이 천천히 따라오셨다. 새벽 경매장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 하셨다.


어둠 가운데 환하게 불이 켜진 새벽의 경매장에서는 비린내가 싱싱했다. 차갑게 펄떡이는 물고기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 냄새는 긴 앞치마를 두르고 궤짝을 찍어내는 사람들과 번호가 적힌 모자를 쓰고 해독 불가한 소리와 몸짓을 내지르는 남자들 틈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자판기에서 뽑은 백 원짜리 커피가 달았다. 양철통에 피운 모닥불 곁에서 김 오른 주전자가 달삭거렸고, 여자가 타주던 오백 원짜리 커피를 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살만해 보였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새벽은 각목이 타는 그윽한 훈연과 커피, 역하지 않은 비릿함으로 조화로웠다. 나의 눈이 오랜만에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신부님이 말없이 쥐어주신 기차표를 꺼내 보았다. 카드 반 장만한 도톰한 종이 위에 도착지가 찍혀 있었다. 내가 짧은 여행 후에 시를 완성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마르께스의 소설 내용도 흐릿하다. 하지만 익숙한 이름의 그곳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사실은 선명했다.


유리창에 찍어 두었던 발자국을 되짚어 오는 길이었다.

떠난 사람은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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