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밑줄을 긋고 싶어 지는데, 이것은 글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 내가 하는 헛짓이다. 문장의 끝에서 처음으로 오가면서 여남은 번을 읽고 이해하면 될 것을 굳이 밑줄을 친다. 밑줄을 치는 행위는 문장을 소유하는 하나의 방식인데, 연필로 소유하는 것보다 볼펜으로 줄 친 문장이 더 강하게 기억되는 것도 아닐 텐데, 굳이 펜으로 긋는 나는 소유 집착증이다.
‘문장 소유 집착증’이 심한 나는 가끔 형광펜을 쓰고 인덱스를 붙여 표시한다. 책은 인덱스를 붙이기 전에 이미 지뢰밭이 되는데, 발목 지뢰를 좋아하는 나는 얕고 가벼운 문구의 밑줄이 많다. 반드시 기억하고 싶은 곳에는 인덱스로 구별하는데, 인덱스가 지나치면 다시 찾기 힘들다. 인덱스는 한 권에 10개 내외가 적당하다.
밑줄에서 시작한 소유욕은 형광펜과 인덱스에서 멈추지 않고, 책의 여백에는 작고 빽빽한 글을 흔적으로 남긴다. 생각은 휘발성이 강해 그림자처럼 붙들어 둘 수 없어 난감하고, 그 모양을 기억할 수 없어 곧장 여백에 잡아 둔다.
이쯤 되면 나의 집착증은 만족하고 물러설 줄 안다. 헛짓인 줄 알지만 물러서지 못하고 책 언저리를 떠나지 못할 때는, 헛헛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날이다.
글을 소유하려는 나의 강박과 달리 어떤 이들은 구조를 통해 글과 생각을 펼친다. 생각을 단어로 붙잡으려는 나와 달리, 구조와 논리로 글을 받아들이는 사람. 정선된 글을 읽으며 구조를 배우고, 거기서 영감을 얻는 이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레비스트로스였다.
레비스트로스는 고백한다.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구조가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잘 씌어진 글을 읽는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그가 아무 데나 펼치고 읽으며 영감을 얻는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명저이다.
문장을 소유하려 애쓰는 나와 달리, 마르크스는 글쓰기 자체보다는 사유의 논리와 구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쓴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글은 늘 논리적이고 치밀하다. 나는 상상한다. 호주머니에 손 넣은 채 발로 글을 쓰는 카를 마르크스를. 그에게 글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흘러넘치는 생각을 양동이에 받아두고 꺼내 쓰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이미 마르크스의 뇌는 한약방의 약재 장처럼 쓰임과 용도가 면밀하게 계산된 것이었고, 그에게 글이란 모래를 눌러 담은 장난감으로 모양을 찍어 내는 것만큼 쉬웠을 것이다. 글의 논리가 일관되고 구성이 농밀한 문장은 기계적 나열만으로도 아름다움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예전에는 마르크스의 글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사상의 경향성을 떠나서, 글 자체가 갖는 힘과 멋이 있는데 말이다. 대학생 시절 수많은 글을 읽고, 감옥에서 ‘항소이유서’를 썼던 청년 유시민 작가가 오버 랩 된다. 유려하고 논리 정연한 유시민 작가의 글은 마르크스적 구조에 빚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밑줄을 긋고 인덱스를 붙이고 여백에 생각을 눌러 담는다. 그리고 구조와 논리로 글을 생산하는 이들 앞에서 나의 소유적 집착증은 한계에 봉착했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레비스토로스처럼 읽고 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