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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에서 온 선물

예기치 않은 감자의 도착

내가 나의 병을 실시간으로 알린 것은 나의 오래된 친구들이 모여있는 톡방.

당황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묵묵히 느끼다가 먹을 것을 하나씩 보내준 친구들이 있다.

야채 손질이 싫어서 요리도 안해먹는 국선은 느닷없이 전복을, 구례로 내려가 농촌의 생활에 서서히 적응해가고 있는 건학은 손수 기른 감자를 한상자 보내주었다.

그 마음이야 내가 왜 모르겠는가만은, 식재료조차 머리속에 충분히 설계하고 얼마동안 먹을 것인지 무엇을 먹을것인지 대강 가늠한 후 주문하는 극J인 내게, 예기치 않은 식재료의 도착은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뭔가 버려지는 것을 잘 보지 못하는 내게는 매우 중요한 미션이 갑자기 던져진 것이다.

특히 전복이라니. 어패류 손질은 특히나 내가 꺼리는 일이었다. 요즘 생선은 뼈까지 다 발라 팩에 넣어주니 아들이 좋아하는 고등어를 다시 먹기 시작했지만, 아이들이 자란 후 껍질 째 판매하는 게나 새우, 조개는 우리집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식재료다. 우리 아이들은 굴비가 키웠다고 할 수 있을만큼 끼니 때마다 생선 바르는 일은 늘 내 일이었다. 학교 급식에 생선이 나오면 아예 덜어오지 않을 정도로 생선이 싫었다. 게나 새우도 마찬가지였고, 다행히 아이들이 조개는 좋아하지 않았다.


택배로 받자마자 김치냉장고에 넣어두고 인터넷으로 손질법을 검색만 해보고 있었다. 칫솔로 닦아 씻은 후 내장을 바르고 이빨을 떼어내고... 으... 말로만 들어도 싫어서 시간만 지나고 있었다. 신선하게 살아있으라고 산소까지 넣어 보낸 수산시장의 정성에 미안했지만. 그러다 5일 쯤 지난 후 남편이 아니 이걸 왜 이렇게 두고 있냐고 물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 그거 손질 못해 했다. 다행히 남편이 손질해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처음엔 칼집을 넣어 버터에 굽고 맛있게 접시에 담아 같이 먹어야지. 했지만, 이러다가는 냉동실 안의 존재마저 잊힐 위기였다.


구례에서 감자가 왔을 때, 상자를 열어보니 너무 감동이었다. 춤과 예술을 좋아하는 건학이 일가를 이끌고 내려간 구례에서 밥이나 잘 해먹을까 싶었는데 이런 튼실하고 올망졸망 이쁜 감자들을 한상자씩이나 보내다니. 엄마 마음처럼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을 이쁘게 보다가 뒷베란다 그늘진 곳에 두고 나오면서, 아, 저걸로 뭘 해먹어야 하나... 싶었다. 싹이 나오는 순간 얼마나 마음이 미안할 지 충분히 상상이 되었다. 아니지. 그래선 안되지.


일요일 아침에도 여지없이 5시 30분에 깨는 나. 오랜만에 열대야가 사라져 창문을 열어두니 새들이 아침을 지저귀기 시작했다. 한참을 침대에서 뒹굴뒹굴 하다가 오늘 예술의 전당에 샤갈전을 보러 가기로 한 걸 떠올리고 7시쯤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에 집에서 밥먹는 아들의 아침을 준비하고 나가야겠다.

전복과 감자가 오늘의 식재료다.


미역을 꺼내 물에 담그고 냉동실의 전복을 꺼내 해동하고 칼로 잘랐다. 며칠 전 아산병원에서 MRI를 찍고 너무 지쳐서 지하 식당에 갔을 때 뭔가 원기회복을 하고 싶어서 전복소고기미역국 한그릇을 시켜 먹으며, 어, 우리집 전복도 그냥 미역국을 끓이면 좋겠구나. 싶었다.

미역국이라면 내가 몇년 전까지 줄기차게 끓였던 거다. 아들들이 잘 먹으면서도 건강한 음식이었기 때문. 하지만 요즘은 생일이 아니고서는 잘 끓이지 않는다. 집에서 밥 먹을 일이 잘 없고, 국과 탕처럼 국물요리를 멀리하고 있기 때문인 듯.


1. 불린 미역을 잘 씻어 체에 받치고 가위로 먹기 좋게 자른다.

2. 큰 냄비에 들기름을 한바퀴 두르고 달궈지면 불린 미역을 넣고 중불에 지글지글 뒤적이며 볶다가 뚜껑을 덮는다.

3. 미역에서 물이 나오며 한김 끓을 때 국간장을 한바퀴 두르고 뒤적이다가 다시 뚜껑을 덮어 보글보글 끓인다.

4. 한김 오르면 뚜껑을 열어 이외의 재료(소고기 등), 오늘은 전복을 넣고 뒤섞어 볶다가 다시 뚜껑을 닫는다.

5. 김이 오르면 재료가 잠길만큼 물을 부어 불을 올려 팔팔 끓인다.

6. 끓을 때 마늘을 넣고(미역국에 마늘을 안넣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넣는 편을 좋아한다.) 뚜껑을 덮고 약한 불에서 한참(20분?) 우러나도록 끓인다.


이렇게 호사스러운 전복 미역국이 탄생했다.

전복 반, 미역 반, 왕후의 미역국

감자는 전날 밤에 삶아두었다. 전자렌지에 돌리면 빠르지만 맛이 없어서, 냄비에 감자를 넣고 잠길만큼 물을 붓고 소금과 스테비아를 아주 조금 넣고 섞어 중불에 뚜껑을 덮고 끓인다. 자꾸 들여다봐주지 않으면 금새 물이 사라져버려서 당황할 때가 있다. 물이 반쯤 줄면 감자를 뒤집어 혹시나 안익었을까 하는 불안감을 없앤다.

물이 끓다가 자작자작 거의 사라질 즈음엔 몇번 뒤집어가며 마지막으로 익히고, 물이 다 사라지면 불을 끈다.

포슬포슬 감자가 너무 맛나서 뜨거움을 참으며 작은 것 두개를 그 밤에 먹어버렸고, 11시 넘어 온 아들은 자기는 배가 안고프다며 쿨한 척하더니, 작은 거 하나 식혀서 먹어보라고 줬더니 연달아 3개를 먹었다.


미역국을 끓이면서 큰 놈으로 세개를 포크로 으깨고, 여기에 마요네즈와 치즈, 후주, 소금 아주 약간, 바질가루를 넣고 섞어 동그랗게 뭉쳐주었다. 베이컨이 있으면 물에 데친 후 후라이팬에 익혀 작게 잘라 섞어주어도 아들이 좋아한다. 여덟개 만들어 두었다.

감자채로 전을 부치면 또 맛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채를 치다가, 샤갈전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와 냉장고에 넣어두고 시마이했다.

감자는 참 쓸모가 많단 말이지. 하지만 뭔가 좀 더 새로운 거 없을까?

이렇게 아픈 나를 위한 마음이 듬뿍 담겨 도착한 전복과 감자를 이용한 아침상이 차려졌다.

샤갈전에 다녀오니 미역국은 1/3이 없어졌고, 감자는 흔적조차 없었다.

남은 미역국은 작은 용기에 나눠 냉동실에 얼려두고 몇번 더 먹을 예정. 남은 감자로는 뭘할까? 싹나기 전에!

내 입에는 그냥 삶은 감자가 제일로 맛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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