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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Jun 13. 2022

나도 아빠의 사랑을 받았었네

필라테스 광고지를 받았다. 할머니가 인도에 서서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 중 광고지를 받아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는 늘 광고지를 받는 편이다. 그래야 저 그분들도 집에 가실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거니까. 

할머니가 아주 기분이 좋으신지 연기인지 기분 좋은 말을 건넨다. 

"멀리서 보니 영락없이 고등학생 같네요"

마스크를 썼으니 웃어도 내 표정이 보이지 않을 거 같아서 살짝 고개로 인사하며 "네, 감사합니다"라고 답하고 왔다. 

이게 무슨 부끄러울 일이라고 낯선 사람이 말을 시켜오니 얼어버렸다. 게다가 할머니인데

암튼 다시 그 길을 지나가야 할 생각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전단지를 다시 주려고 또 멘트를 준비하지 않으시도록 할머니가 보이는 쪽으로 전단지를 들고 걸어갔다. 다행히 내가 지나가는 타이밍에 사람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듯 지나가서 할머니는 누구에게 줘야 할지 고개를 이곳저곳 돌리며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어떤 말을 하면서 줄까?


필라테스 광고지에는 1회에 7900원이라는 파격적인 할인가를 올려놓았다. 예전에 헬스장을 다녀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샤워하는 게 맘에 안 들었다. 칸칸 불투명 유리로 가려져 있긴 했는데, 그래도 거기까지 가다가 누구든 마주칠 수 있었고, 옷을 입고 벗고 할 때도 누군가가 볼 수 있었다. 

마주친 적이 몇 번 안되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헬스장도 필라테스도 가기 싫다. 

그냥 내 집에서 배우고 씻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본다. 게으름 탓도 있지만, 정말 목욕탕에서 모두 벗고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다들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나는 몹시 부끄럽다. 

미약한 몸매라서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걸까? 

남편은 언젠가 남자들 중에 자신의 거기가 큰 사람은 목욕탕에서 가리지 않고 자랑스럽게 다닌다고 했다. 

여자들도 그런 비슷하게 있는 것 같다. 나는 차마 나의 빈약함을 보여주며 자존감을 지켜내지 못할 거 같아서 그토록 싫어하고 있나 보다. 


그러면서 오늘 제시가 가슴 성형을 했다는 기사를 찾아보고는 제시의 성형전 모습이 더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원래 이미지가 더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지금은 너무 센 이미지와 성형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이미지로 변해 있었다. 이 글을 제시가 보지 말아야 할 텐데. 

아무튼 나는 제시처럼 가슴성형을 하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가 제시의 성형전 모습이 더 예쁘고 자연스러워서 혼동스러웠다. 


어제 9시 20분부터 자러 들어가서 아침이 될 때까지 푹 잤음에도 피로했다. 아이들이랑 집에 돌아와서 두 녀석의 행패를 보고 있으려니 나는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언제 끊어져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 목소리는 엄해졌고 공격적이고 무서운 말투로 얘기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좀 더 들어봐 줘도 될 텐데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해. 한 번 말하면 듣도록 해"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고, 아이들의 말은 싹둑 잘랐다. 


그런데 난데없이 첫둥이가 줄넘기를 하고 싶다며 밖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7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이어서 우리 집에서는 이 시간이면 잘 준비를 하며 씻고 책을 읽거나 하는데 ,

갑자기 나간다고 하니 몇 배나 더 피곤해졌다. 그러면서 주차장의 차들이 갑자기 나오거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꼬부기에게도 나오라고 얘기하더니 첫둥이만 먼저 내려갔다. 

첫둥이는 몇 번이나 인터폰을 해서 언제 내려오는지를 묻고 가죽 가방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가죽 가방을 말하는 걸까? 가죽 가방이 뭔지는 알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화가 나려던 찰나에 본인이 와서 하겠다고 한다. 


보니 그 가방 안에 아주 예전에 넣어둔 줄넘기의 구슬 한 개가 있었다. 그것을 기억해 내고 찾은 게다. 

줄넘기 줄을 더 길게 하고 싶단다. 


아이의 기억력과 세심함에 좀 놀라서 내가 또 화냈었다면 아이가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생각했다. 

어젯밤에도 아이는 어둠 속에서 누워서 몇 가지 얘기를 하다가 엄마, 나 잠이 안 와라고 말하는데 

이제 그만 말하라며 짜증을 섞어서 말을 싹둑 잘라 버렸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무 말없이 잠든 아이에게 미안함이 몰려와서 잠이 안 왔다. 

우리 아빠가 그랬었는데 

우리가 뭘 하고 있으면, 아주 귀찮다는 듯이 우리의 하는 일이 하찮은 것이니 당장 그만두라는 식으로 항상 얘기하셨다. "아, 알았으니 이제 가서 공부해"

"얼른 들어가" 


그렇게 우리와 헤어지고 싶어 하셨다. 그렇게 우릴 귀찮아하셨다. 나도 그러고 있다. 그래서 이 저주를 끊고 싶었다. 아빠와 나는 그렇게 헤어졌다. 

중학생 때부턴가는 내 방으로 들어갔고, 아빠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집은 늘 조용했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밥 먹을 때 가끔 만나는 정도가 되었다. 

아빠는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내 빈 책상을 보면서 눈물이 났었다고 했는데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항상 없어지길 바라고 귀찮아했었던 사람이 내가 없어서 눈물이 났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생각했다. 아마 둘째도 대학에 들어가서 이제 완전히 독립했다고 생각하시면서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덧없이 흘러가네 하며 다가오고 있는 죽음을 생각하며 허무함이 밀려와 눈물이 났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낳고 나서 그리고 지금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조금씩 아빠도 나를 사랑했었겠구나 생각이 들곤 한다. 

표현 방법이 너무 이상하고 잘못돼있어서 내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내가 첫둥이를 낳아서 모유 수유하고 있을 때 아빠는 나의 그런 모습을 싫어하셨다. "이제 이유식을 아주 맛있게 만들어서 주고 모유수유는 끊어버려라"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이 불쾌하고 화가 났었다. 나는 나보다 더 소중한 아기가 생기고 모유를 줄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데 그것도 모르나? 손자를 사랑하지도 않다니 라며 화가 났었다. 

날 사랑하지도 않더니 손자도 사랑하지 않네!

그러나, 내가 아프고 나서 수술하고, 갑상선이 없어지고 나니 아빠가 했던 말들이 다시 떠오르며 이해가 된다. 아빠는 내가 내 몸을 돌봤으면 좋겠는데 몸도 약한 녀석이 자신의 몸에서 빼내서 아이를 먹이고 있으니 못 견디게 싫었었나 보다. 엄마가 우리에게 젖줄 때는 좋다고 생각하셨을 테지만 자식이 그러고 있으니 못마땅하셨던게다. 


어쩌다 갑자기 셋째가 생겼었다. 그때는 갑상선암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서 알고 있을 때였다. 나는 추적관찰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필 그때 갑상선 약도 안 먹고 있었는데 임신이 되었다고 해서 겁이 덜컥 났다. 약도 안 먹었는데 아기에게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나는 몸도 안 좋아서 아이를 키울 힘도 없고 뱃속에서 품고 있을 힘도 없을 만큼 체력도 나이도 안되는데 어쩌지?


친정엄마나 언니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다. 말했다가 엄마의 호통 소리와 비난과 질책을 들어야 했을 것이니까. '너 미쳤어! 지금 니 몸이 안 좋은데 어쩌냐! 지금 임신하면 어떻게 하냐!'

그렇게 말할 게 뻔해서 차마 얘기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시부모님께는 말씀드렸다. 시댁에 오라고 하셔서 그때 못 가면서 얘기했었다. 그런데 두 분은 너무나 좋아하셨다. 셋째가 생긴다고. 


그때,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는 돌아가셔서 안 계셨었지만,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화를 내면서 가서 아기를 떼 버려라고 소리 질렀을게 뻔하다 생각했다. 지금에서야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해가 간다. 

아빠는 내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가 나도 사랑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 임신소동은 몇 주뒤 유산되어 끝났다. 유산되어 슬프긴 했지만,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빠는 내가 갑상선암이라는 것을 모르고 돌아가셨으니 그때 갑자기 돌아가신 게 차라리 잘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빠는 언니가 갑상선암이라고 했을 때(언니도 수년전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고향을 떠나셨다. 고향이 여수였는데, 고향을 떠나 언니가 있는 여주로 가서 언니와 더부살이를 하며 언니가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엄마에게 협박을 하면서 까지. 

"다 큰 딸 죽는 거 보고 싶냐"며 당장 가야 한다고 해서 엄마는 하고 싶던 것도 다 포기한 채 언니네 집에서 식모처럼 일하며 아이를 돌보았다. 


엄마는 항상 그로 인해 아빠를 미워했다. "자식 어떻게 될까 봐 저렇게 나를 식모살이시킨다"고 매번 이야기하셨다. 

그런데, 언니는 아직도 갑상선암이 커지지 않고 있어서 수술도 안 하고 잘 살고 있다. 

그러니 내 갑상선암이 언니 꺼보다 2배도 더 넘게 크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놀라자빠지셨을지 모른다. 문득 아빠가 그립고 나도 아빠의 사랑을 받았었구나 하는 생각에 따뜻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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