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힘 3

민중문학상/ 단편소설

by 명희진

온종일 때 이른 봄비가 내렸다. 뉴스에서는 봄비가 내릴 거라 했지만, 내린다는 표현보다는 퍼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비는 속수무책으로 쏟아졌다. 매일 기원으로 출근하던 할아버지도 장대비에 외출을 망설이는 것 같았다. 백수인 삼촌은 제 방에서 헤드셋을 끼고 인터넷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할머니는 내 방에서 할아버지가 나가기만 기다렸고, 아빠와 엄마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봤다. 어디선가 말소리가 높아지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뭐? 강간이라고?”


“조용히 좀 해. 다들 듣겠어.”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당신 미쳤어? 요새 시 쓴다고 여기저기 쏘다니더니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당신, 말이라고 다 말은 아니야.”


“내 말이 그 말이야.”


본래 싸움이라는 게 그러하듯, 아빠와 엄마는 대화 도중 서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서로의 약하고 아픈 부분들을 긁는 일에 더 집중했다.

할머니와 나는 아빠, 엄마의 말소리에 귀 기울였다. 나는 내가 강간이라는 단어를 정말 들었는지 확실하지 않아서 문에 귀를 바짝 댔다.


“어머님이 그랬단 말이야.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는데 그런 것 같다고. 그렇긴 하잖아. 당신 어머님이 당신 낳았을 때 겨우 우리 시우보다 한 살 많았어.”


나처럼 문에 바짝 귀를 대고 앉은 할머니를 내려다봤다. 고등학교 졸업을 일 년 남기고 할머니는 임신했다. 잠시 시골에 다니러 왔던 할아버지는 서울로 돌아간 후였다. 집에서 쫓겨난 할머니는 무작정 할아버지를 찾아가 그곳에 짐을 풀었다. 누가 누구의 발목을 잡았다는 걸까?


아빠의 가정통신란을 채우는 일이 할머니에게는 고역이었다. 서울에서 번듯한 대학을 나온 할아버지와 달리 할머니는 거짓으로 학력을 써야 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나가는 모임에서도 할머니는 늘 기가 죽어 있었다. 말 한마디를 할 때도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바짝 긴장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유명인들의 학위 조작 사건이 불거졌을 때도 할머니는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을 가거나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씩씩대는 아빠의 거친 숨소리가 나무문을 뚫고 들렸다. 엄마의 목소리는 쥐가 비누를 갉는 소리처럼 조용했다. 싸움은 잦아드는 빗줄기처럼 수그러지는 것 같았다. 간혹 ‘뭐?’라고 묻는 아빠의 성난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텔레비전 소리가 아빠, 엄마의 음성보다 높아져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할머니는 겸연쩍은 듯 목덜미를 쓸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책상 앞에 앉아 키티가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는 월터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장면을 읽었다. 책에서는 죽어가는 월터의 수척한 얼굴에 어떤 기색이 비쳤다고 했다. 어떤? 기쁨이었을까? 안타까움이었을까? 키티의 말을 믿기는 했을까? 이런 생각으로 글자들을 읽어 나가는데, 우다탕 뭔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쩍, 무언가 단단한 것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엄마의 짧은 비명이 축축한 빗소리에 섞였다.


방문을 열고 나간 할머니와 내가 본 것은 할아버지가 아빠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었다. 다시 올라간 할아버지의 손이 봄바람에 살랑대는 나뭇잎처럼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그 사이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막고 섰다. 이 상황에 누구보다 놀란 건 엄마였다. 할머니 때문에 아빠와 싸웠는데 정 가운데 검은 구멍이 뚫린 텔레비전은 상관없이, 그 앞에 앉아 있는 며느리는 아랑곳없이, 제 아들을 꽉 끌어안은 할머니의 모습은 내가 봐도 과도한 행동이었다.


요사이 할머니와 엄마의 사이는 최고 정점을 찍고 있었다. 삼촌에게 징그럽다는 말을 한 이후 할머니는 엄마의 사소한 말 한마디도 사사건건 짚고 넘어갔었다. 엄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문제만 아니라면 요즘처럼 편한 시절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할머니와 엄마를 가깝게 한 건 할머니의 이혼과 관련이 있었다. 거기에는 하필 그 시기에 엄마가 페미니즘인지 뭔지를 배웠다는 것도 중대한 작용을 했다.


엄마는 급기야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의 울음소리만 외로운 신문고처럼 거실 안을 울렸다. 그때 삼촌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얼굴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삼촌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 모든 일이 삼촌 때문인 것 같았다. 삼촌이 집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엄마와 정자 씨의 재회는 교무실에서 이뤄졌다. 각자 상담하고 있던 터라 가벼운 눈인사만 나눴지만, 엄마는 세련된 정자 씨의 모습에 놀랐다. 또한, 아빠와 이혼을 고려하는 중이라 정자 씨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정자 씨의 상담 내용을 들은 엄마는 몰라보게 예뻐진 정자 씨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혼은 절대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모든 건 귀한 자료라던 유의 동영상 때문이었다.


그것도 포르노라니. 할머니의 젖을 만지며 자는 삼촌을 본 후로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를 만들던 엄마였다.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의 장래 희망이 포르노 배우라는 게 엄마뿐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평범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거기에 반응하는 정자 씨의 표정은 여느 엄마들과는 달랐다. 유를 믿는다는 정자 씨의 당당한 목소리가 엄마를 소름 끼치게 했다. 그 순간, 자기 자식에게 절대적 신뢰를 보이는 할머니가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그 후 나와 유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됐다. 죽을 만큼 서로 사랑하거나 애틋한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라, 못 만나게 하니 이상하게 더 만나고 싶었다.


그저 학원이 끝나고 함께 오다 이런저런 이야기나 하는 게 다였는데, 엄마의 성화로 다른 학원으로 옮긴 후에는 시간을 정해 후미진 곳에서 몰래 만났다. 삼 주 동안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유는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퇴학을 당했다는 소문과, 정자 씨가 교장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줘 징계가 정학에서 멈췄다는 소문이 돌았다. 남자아이들에게 유는 영웅이었고 여자아이들에게 유는 변태에 사이코패스였다.


엄마는 유의 눈이 예전부터 음흉하니 뭔가 이상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전에 엄마가 유는 눈초리가 처져서 선하게 보인다고 말했던 걸 기억했다. 주변의 친구들은 유가 자신들을 보며 했을 상상에 치를 떨었다. 나는 유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은 걸 알고 있다. 주변에서 말하듯 잠재적인 성추행범이나 성폭행범이 될 가능성도 없다. 유의 컬렉션은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카드를 모으거나 값비싼 인형을 모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정한 변태는 삼촌이다. 할머니와 유의 사건으로 점차 커지는 기억이 있었다.


사각팬티만 입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 삼촌과 마주치는 일이 견디기 어려웠다. 슬쩍슬쩍 살결을 스치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간혹 내 어깨를 꽉 잡으며 이를 드러내고 웃는 것도 역겨웠다. 나는 눈을 흘기다가도 얼굴이 벌게지는 걸 느꼈다. 집에 삼촌과 둘이 있을 땐 방문을 잠갔다. 엄마에게 유의 사건을 들은 할머니는 내가 방문 잠그는 걸 싫어했다. 내가 유에게서 받은 무언가를 몰래 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 자주 등 뒤를 기웃거리고 책상 청소를 부지런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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