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문학상/ 단편소설/ 최종회
로맨스 소설을 쓴 건 J 때문이었다. 나의 어딘가 잘못되고 있다고 J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무도 우리 안의 차갑고 어두운 벽을 눈치채지 못하게, 밝고 행복한 얼굴로 말이다. 마을을 벗어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세게 쏟아지는 비 때문에 택시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왜 에이프릴은 이혼하자고 하지 않는 거지?”
나는 창밖에 시선을 둔 채 레아에게 물었다.
“이혼이요? 필리핀엔 divorce 없어요. separate만 있지.”
잠시 후 비가 멈추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햇살이 쨍쨍했다. 레아와 나는 말이 없었다.
“저희 엄마 아빠도 그냥 따로 결혼해 사는 거예요.”
나는 레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라군파크 앞이었다. 멀리 박물관이 보이고 그 앞에 소와 여신, 활을 쏘는 청년과 당나귀, 호랑이와 어린 여자아이, 갓난아기를 안은 여인의 조형물이 아무 연관성 없이 세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연못 난간에 기대 옆사람과 대화하거나, 과자 부스러기를 연못에 던지며 오후를 즐겼다. 그 사이로 맨발인 어린아이들이 손을 내밀어 구걸했다. 눈은 그 중이 실망한 듯 돌아서는 한 아이를 좇았다. 나는 준이 저 아이처럼 살 거로 멋대로 상상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사랑을 구걸할 거라고. J를 닮은 아이를, 나의 아이이기도 한 그 아이를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죽은 J도 바라는 일이라 믿었다. J의 아이를 구원하고 싶었다. 이기적이고 어리석게도 나는 그런 방식으로 J를 사랑했다.
“일본 아빠 말고요.”
레아가 덧붙이듯 말했다.
“하긴 끊는다고 끊어지는 것도 아니지.”
레아는 내 말에는 관심 없는 듯 제 가방 속의 책을 만지작거렸다. 일본어로 쓰인 소설이었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트라이시클 뒤에 아이를 태운 소년이 보였다. 기사에게 멈추라고 한 후, 택시에서 내려 쉭, 바람 소리를 냈다. 소년은 듣지 못하고 느릿느릿 페달을 굴려 앞으로 갔다. 달려가 트라이시클 앞에 섰다.
“안녕.”
“안녕하세요.”
소년이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놀라 인사했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여 동양 아이처럼 인사했다.
“누구예요?”
택시에서 내린 레아가 아이들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내 친구들.”
아이들에게 공원으로 가자고 말하고, 레아에게 돈을 줘 먹을 걸 사다 달라 부탁했다. 소년은 머뭇머뭇 페달을 밟고 아이는 뒤에서 트라이시클을 밀었다. 일 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소년에게 이십 페소를 내밀자, 소년은 받지 않겠다는 듯 팔을 휘저었다. 내 시선이 뒤의 아이에게로 향하자, 얼굴을 찡그리며 무어라 따갈로어로 소리쳤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받으면 안 된다는 말 같았다.
“나 이거 가르쳐줘.”
나는 한국어로 씩씩하게 말했다.
“가르쳐?”
소년은 그 뜻을 모르는 듯 내 말을 따라 했다. 그러면서도 돈을 받으라는 줄 알고 계속 손을 저었다. 나는 트라이시클 핸들을 잡고 타는 시늉을 하며, 배우고 싶다고 영어로 부탁했다.
“브레이크 없어.”
소년이 고심 끝에 트라이시클 아래를 손가락질했다. 위험하다는 의미였다. 나는 이미 소년이 발로 속도를 조절하는 걸 알고 있었다. 오른쪽 슬리퍼의 앞부분이 왼쪽보다 더 닳아 있는 것도.
“뒤에서 잡아 줘.”
잠시 뒤 양손에 과자가 든 봉지를 들고 레아가 돌아왔다. 나는 레아에게 정확한 통역을 부탁했다. 어려서부터 자전거가 너무 배우고 싶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와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만났을 뿐 아니라, 나는 너희를 친구로 생각한다고 했다. 레아는 통역하면서 키득거렸다. 나는 레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이들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면 곤란했다. 레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이들이 웃었다.
“뭐라고 했어?”
“불쌍하니까 한 번만 도와주라고요.”
“일주일 동안이야.”
나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아이를 안아 좌석에 앉힌 후 소년에게 운전석에서 비키라고 손짓했다. 소년은 주춤주춤 일어서 트라이시클 옆에 섰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천천히 페달을 굴렸다. 트라이시클이 뒤뚱이며 앞으로 나갔다. 소년은 일주일 동안 나에게 트라이시클 타는 법을 가르쳐 줄 거다. 나는 부러 뒤뚱이고 부러 넘어지려고 마음먹었다. 소년과 아이는 나와 함께 뒤뚱이고 넘어지고 웃을 것이다. 속이 다 드러나게 웃다 보면 소년의 손을 가르는 굵은 손금도, 소년의 손에 어울리는 모양으로 자라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J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아이들에게 내 이름도 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이들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름은 천천히 알아도 된다. 소년이 서서히 속도를 내어 트라이시클을 밀었다.
“천천히.”
소년을 향해 한국어로 소리치자, 소년과 아이가 무구하게 웃었다. 적색과 보랏빛이 섞인 노을이 멀리 보이는 것들을 그림자로 만들어갔다. 이곳의 석양은 고된 하루를 보낸 이들에게 주는 신의 미소라고 J는 종종 말했다. 그때가 유일하게 그가 마음을 비치는 순간이었다.
핸들을 잡은 손을 놓고 팔을 활짝 펼쳤다. 뒤에서 중심을 잡는 소년의 힘이 느껴졌다. 다시 핸들을 잡고 페달을 굴렸다. 속도가 빨라지면 오른발 끝을 땅에 대어 속도를 줄였다. 쉭쉭, 바닥에 신발 끌리는 소리를 들으며 에이프릴이 부탁한 아름다운 사랑을 떠올렸다. 그건 내가 바라던 J와의 모습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번엔 행복한 이야기를 쓰기 어려울지도. 어쩌면 소년과 아이의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레아가 벤치에 앉아 무릎에 책을 펼쳤다. 일본어로 된 책이었다. 나는 레아가 의미도 모르는 그 책에서 엄마의 흔적을 읽는 걸 안다. 자신과 같은 언어로 낯선 단어의 뜻을 적어 나간 엄마의 흔적과 시간이, 책 안에 오롯이 존재했다. 레아는 점점 그림자로 변했고 소년과 나도 그렇게 보일거였다. 이제 어쩌면 우리 이야기를 써봐도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