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지나는 동안 4

민중문학상/ 단편소설

by 명희진

유리가 없는 창밖으로 깔라만씨 나뭇잎이 햇살에 반짝였다. J는 감기에 걸렸을 때 튜터 중 하나가 가져다준 깔라만씨로 만든 음료를 마시고 나았다고 했다. 그 튜터가 에이프릴이었을 거다. J는 자주 감기에 걸렸고, 기온이 조금만 달라져도 기침을 했다. 나는 석류 알을 설탕에 재어 만든 음료를 매일 아침 J에게 줬다. J는 석류 음료를 보며 깔라만씨를 떠올렸을 거고 자연스레 에이프릴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나는 깔라만씨와 비슷한 레몬으로 차를 만들었다. J가 그리워한 것은 깔라만씨가 아니었는데도.


“미안해요. 사람들한테 어머니가 한국에서 소설가 선생님이 온다고 해서. 덥죠?”


에이프릴은 봉지에 얼린 얼음을 송곳으로 깨 음료수가 든 병에 넣었다.


“예쁘게 하고 올 걸 그랬어.”


“저도요.”


에이프릴이 건네는 음료수 잔을 받으며 레아가 맞장구쳤다. 나와 레아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에이프릴이 식탁을 차리는 걸 봤다. 에이프릴은 우리가 도와주겠다는 걸 극구 말렸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과장된 미소를 지었다. 텔레비전을 보지도 그렇다고 대놓고 시선을 문 쪽으로 두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릴없이 서성이며 집 안을 살폈다. J의 흔적을 찾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집은 J와 헤어지고도 한참 후부터 짓기 시작했다는 에이프릴은 말했다. 성인 눈높이 정도에 나무로 된 선반이 있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그 위를 살폈다. 거기, 보라카이 샌드가 있었다. J와 내가 신혼여행 때 산 것과 같은 거였다. 단지 모래 속의 이니셜만 J & A로 달랐다. 그리고 그 뒤에 스물세 살의 J가 에이프릴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모래가 든 병과 J의 사진을 손에 쥐고 식탁을 차리는 에이프릴과 텔레비전을 보는 레아를 번갈아 봤다. 사진 속 J와 에이프릴은 웃고 있었다. 그건 내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J였다. J의 시간이 그 안에서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사진을 주머니에 넣고 모래가 든 병을 만지작대며 주위를 둘러봤다. J와 에이프릴이 함께 한 사진도, 모래도 모두 없애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병을 쥔 손가락에 힘만 빼면 될 일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그들의 시간이 바닥에 흩어지는 것을, 어디에 담아도 그저 곱게 색칠된 모래 이상이 아니게 되길 바랐다. 문신을 새기듯 이니셜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J가 거기 서 있었다. J와 같은 눈의 아이가, 동양인의 피부를 가진 아이가, 빠끔 문 안을 들여다보고는 환영처럼 사라졌다.


“준!”


아이를 향해 몸을 튼 순간 에이프릴이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거 J와 보라카이 갔을 때 그 사람이 만든 거예요. 그 이후로 거긴 가보지도 못했어요.”


“그래요? 나도 같은 것이 있어서.”


보라카이 샌드는 직접 디자인을 할 수 있다. 모래의 색을 정하고 거기 들어갈 간단한 그림을 고르는 일. 우리는 그곳에 전시된 디자인을 골랐다. 아니, 내가 그 디자인을 골랐다. 에이프릴과 같은. J가 만든.


“보라카이에 가 봤어요? 아름답죠?”


에이프릴은 분주히 식탁을 차리면서도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고 질문했다.


“신혼여행이었어요.”


나는 퉁명스럽게 답하고는 보라카이 샌드를 손안에 꽉 쥐었다가 선반 위에 올렸다. J는 필리핀은 지겹다며 발리로 신혼여행을 가자고 했다. 발리를 찍은 사진이 든 팸플릿을 보이며 적극적이었다. 보라카이를 고집한 건 나였다.


“미안해요.”


레아를 통해 남편의 사고를 들은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나는 그가 J인지 모르는 에이프릴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에이프릴의 선하고 부드러운 눈을 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식탁에는 김밥과 망고, 떡볶이와 파파야 피클, 오징어 튀김인 깔라마레스와 조가비버터구이 따홍, 치킨인하살과 돼지고기 꼬치구이 등이 놓여 있었다.


“와, 일주일은 있어야겠다.”


꼬치 하나나 적은 양의 반찬과 밥으로 식사하는 필리핀 사람들의 특성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준, 와서 인사해야지.”


에이프릴이 아이를 불렀다. 쭈뼛쭈뼛 아이가 집 안으로 들어와 제 엄마에게로 걸어갔다. 아이의 앞모습과 옆모습 그리고 뒤통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레아가 아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만지며 장난을 치자,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아이의 왼 볼로 깊이 보조개가 들어갔다. 아이는 레아와 장난을 치면서도 나를 잊지 않은 듯 흘끔거렸다. 아이를 관찰하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돌리거나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식탁에 앉기 전 아이가 김밥 하나를 집어 잽싸게 제 입에 넣었다. 에이프릴이 아이의 손등을 탁 소리 나게 때리면서 따갈로어로 나무라자 아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눈동자는 에이프릴을 닮았다. 눈의 형태는 J를 닮아 옆으로 길었지만, 그 안의 눈동자는 에이프릴을 닮아 부드러운 황갈색이었다.


“김밥을 좋아하니?”


나는 아이의 손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이는 눈물방울을 뚝 떨어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J에게도 아이와 같은 나이였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마음이 원하는 것보다는 예절이나 어떤 규칙을 먼저 배워야 하는.


나는 에이프릴이 서운하지 않을 만큼의 음식을 먹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를 보면 J가 떠올랐고 음식을 보면 J와 에이프릴의 식탁이 떠올랐다. 그들의 식탁을 오갔을 대화와 손짓과 몸짓과 눈빛들. 그것들이 자꾸 식탁 위에 올라앉았다.


나는 아이가 왼손으로 포크를 집는 것과 자주 콧잔등을 찌푸린다는 것을 알았다. J는 글씨는 오른손으로 썼지만, 젓가락을 쥐는 건 왼손을 썼다. 나는 J가 콧잔등을 찌푸리는 게 좋았다. J가 책을 읽거나 일을 할 때, 그의 콧잔등을 보면 그가 집중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다. 아이를 보며, 어쩌면 습관도 유전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보다 아름답게 써 주세요.”


택시에 오르기 전 에이프릴은 부끄러운 듯 부탁했다. 아이가 그녀의 손을 꽉 쥐고 나를 올려다봤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나도 알아요.”


아이를 의식한 듯 에이프릴은 낮게 속삭였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아이를 서둘러 들여보냈다.


“아이가 받는 놀림도 모르지 않아요. 사람들이 아이를 ‘코피노’라고 부르는 것도. 필리피노나 한국인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그렇지만 아름다웠으면 좋겠어요. 사랑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지 않아요.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잖아요. 그에게도 그만의 사정이 있었겠죠. 적어도 그 시간에 그가 나를 사랑한 건 맞아요. 저는 확신해요.”


에이프릴은 확신을 발음 할때는 감정을 억누르듯 침을 삼켰다.


“아이 아빠가 아이를 찾아올 수도 있잖아요.”


나는 에이프릴의 진심이 궁금해 교활한 마녀처럼 물었다. 여전히 J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J가 죽기 전 어떤 연락이라도 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었다.


“사실…….”


준이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에이프릴이 뒤돌아 아이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 아빠에게 이메일을 보냈어요. 전화하려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서.”


“무슨 소식이라도…….”


나는 숙련된 배우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시선은 문밖으로 고개를 빠끔 내밀고 이쪽을 보는 준에게로 가 있었다.


“아니요. 그렇지만 후회해요. 그 사람이 와서 아이를 데려갈까 무서워요. 매일 불안해요. 그래서 처음에 인터뷰도 거절한 거예요. 사실 어마어마한 금액을 말했을 때, 그가 보낸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무섭고 두렵기도 했지만, 조금은 기대하기도 했어요.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바보처럼.”


에이프릴은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나도 모르게 엉거주춤 에이프릴을 안았다. 그녀의 귀에 대고 다 잘될 거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택시 뒤로 에이프릴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쪼르륵 달려온 준이 에이프릴 옆에서 허공에 대고 세차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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