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문학상/ 단편소설
호텔 밖으로 나왔다. 에이프릴과 레아는 여전히 방에 있었다. 처음엔 바람만 쐬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나 때문에 레아가 속에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아 잠시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어느새 비가 멈추고 찌는 햇살이 쏟아졌다. 멍하니 서 있는 내 앞에 트라이시클 한 대가 섰다. 소년과 그의 동생이었다. 트라이시클이 서자마자 아이가 뒷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가자!’라고 외쳤다. 소년의 등에는 여전히 ‘곷ㅁ낙’이라 적혀 있었다.
“마사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년은 페달을 밟았다. 아이가 달려와 뒤에서 트라이시클을 밀었다. 아이의 손이 등에 닿을 때마다 더운 기운이 몸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가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소년의 등을 두드려 어디서 한국어를 배웠는지 묻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좀 전에 일어난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다.
“에이프릴이 다음 주에 집으로 초대했어요.”
샤워하는 동안 깼는지 레아는 책상 옆에 서 있었다. 마사지 가게에서 돌아왔을 때, 레아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자신의 가방끈을 만지작대던 레아가 결심이라도 한 듯 가방을 어깨에 멨다. 낮 동안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지, 그러고도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괜찮다거나 그만 가보라고 먼저 말을 꺼내 레아가 안심할 걸 알면서도 젖은 머리의 물기를 털기만 했다.
“저기, 아까 죄송해요. 인터뷰 중이었는데.”
레아의 가방은 어느새 어깨에서 손목으로 떨어져 있었다. 레아는 가방끈을 손목에 감고 만지작댔다.
“괜찮아. 늦었는데, 그만 가봐.”
나는 화장대에 서서 스킨과 로션을 바르며 레아를 흘끗 봤다. 잔뜩 주눅 든 아이처럼 서 있는 게 불편하고 못마땅했다.
“여기. 늦었으니까 택시 타고 가.”
나는 백 페소짜리 하나를 레아에게 건넸다. 레아는 머뭇거리며 돈을 받아 들고도 선뜻 나가지 못했다. 택시비로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애초에 사람을 구할 때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이를 알아봤다. 삼십 페소를 택시비로 쓰고도 칠십 페소가 남았다. 레아의 시간당 아르바이트 비용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안 갈 거니?”
“작가님은 내가 왜 울었는지 안 궁금해요?”
나는 텔레비전 음성을 낮추고 여전히 책상 옆에 서 있는 레아가 진짜 알고 싶은 데 뭔지 가늠했다.
“삼 개월이나 같이 있었는데, 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 궁금해해요, 작가님은.”
“스무 살이고 이름은 레아고 이모랑 살잖아. 엄마는 일본 사람하고 결혼했고 레아에겐 일본인 여동생이 있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잖아. 레아 엄마는 일본으로 오라고 하지만 레아는 일본보다는 한국이 좋다며. 지금 한국에 있는 대학도 알아보고 있고. 이보다 더 알아야 하니?”
나는 텔레비전을 켰다. 텔레비전에서는 물에 잠긴 마닐라 시내가 나왔다. 비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퍼부었다. 지붕 위에 서거나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은, 물속에 잠기거나 떠밀려가는 자동차와 세간을 망연히 바라봤다. 붉은 흙탕물 위로 초라한 보트를 타고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도 구조가 필요 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도 궁금해. 왜 울었는지. 그저 이유가 있었을 거로 생각할 뿐이야. 그래서 나한테 말하고 싶니?”
레아는 잠시 생각이라도 하는지 같은 자세로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아니요. 그러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레아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평소의 레아라면 한 손을 번쩍 들어 가벼운 인사를 했을 거다. 나는 레아의 그런 모습이 기시감처럼 느껴져 불편했다. J도 그랬겠지. 불만을 품고 주변을 서성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가 답답했겠지.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가끔 J는 그런 말을 했다. 다 알고 있지만 네 입으로 말하라는 듯이.
텔레비전의 음성을 높였다. 여기저기서 휴대전화 찍은 마닐라 홍수 동영상이 나왔다. 물살에 휩쓸려 다리 아래를 지나는 판자 위 일가족이 보였다. 뒤미처 그 모습을 다리 위에서 황망히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이는 금방이라도 잡을 수 있는 듯 허리를 숙여 다리 아래로 손을 뻗었다. 간절하게 그러나 그 손을 빗겨 무심히 흘러가는 뗏목을 차마 볼 수 없어 채널을 돌렸다. ‘7080쇼’라는 코미디에서 채널을 멈추고 멍하니 텔레비전을 봤지만,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레아는 J를 대하던 나를 닮았다. 나는 J의 무덤덤함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그런 J를 내가 바꿀 수 있다 믿었다. 이쪽에서 사랑을 주면, 상대도 변할 거로 믿었다. 사랑 받고 싶었고 J가 내 감정을 알길 바랐다.
택시를 타고 맘부칼을 향해 한 시간 정도 갔다. 레아는 사백오십 페소에 하루 동안 택시를 빌렸다. 처음에 기사는 오백 페소를 불렀지만, 레아는 기어이 오십 페소를 깎았다. 오십 페소면 천 원 정도였으므로 그리 큰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레아는 마사지 가게에서도 카드를 만들어 일일이 무료 마사지를 받게 해 주거나 팁은 이십이나 삼십 페소가 적당하다고 귀띔해 줬다.
“여기부터 산에 해당해요. 리조트 입구 전까지는 마을이에요. 여기 온천도 하고 가면 좋은데.”
맘부칼은 산과 온천이 함께 한 리조트다. 레아는 여기까지 와서 식사만 하고 돌아간다는 게 못마땅한 듯 뒷말을 붙였다. 못 들은 척 나는 창밖만 봤다. 한차례 비가 지난 후라 산의 초록은 산뜻하고 맑았다. 도로 양쪽으로 대나무 집들이 빼곡했다. 간혹 대나무 자체에 만든 집도 있었다. 땅에 뿌리를 박은 대나무 중간에 판을 대고 산의 경사 부분을 지지대로 이용해 만든 집이었다. 집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택시는 벽돌로 지어진 집 앞에서 멈췄다. 그 앞에 에이프릴이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서 있었다.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에이프릴 주변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봤다.
집은 현관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형태를 갖췄지만, 왼쪽은 반만 올린 벽이었다. 그 옆으로 시멘트와 벽돌이 쌓여 있었다. 오른쪽 창문엔 사탕이며 과자가 줄줄이 매달려 있었는데, 에이프릴의 어머니가 하는 가게였다. 안쪽에서 음식을 해서 파는지 테이블에 주르르 놓인 냄비 안에 필리핀 음식이 들어 있었다. 몇 개의 테이블과 의자도 보였는데,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손님이라기보다는 나를 구경 온 이들이었다. 레아와 나는 에이프릴이 안내하는 곳으로 갔다. 시멘트벽과 바닥에 원색의 장난감들이, 좀 전까지 아이가 거기 있었다는 듯 어질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