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루푸스에게 전화가 온 건 요니가 폴란드어 학교에서 돌아와 코트를 벗어 현관 옆 옷걸이에 건 후였다.
여보세요.
요니는 루프스가 하듯 자연스럽게 폴란드어를 썼다.
뭐 하고 있었어?
이제 막 학교에서 왔어요.
요니는 소파에 앉아 가방에서 폴란드어 교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책 사이에 껴 있던 푸른색 종이가 카펫 위로 떨어졌다.
오늘 저녁에 아다를 초대하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
요니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거기에 영어로 적힌 것들을 읽었다. 폴란드어 선생인 크리스틴이 적어준 초콜릿 무스 케이크 레시피였다. 다크초콜릿, 생크림, 버터, 달걀노른자…….
당신, 듣고 있어?
네, 듣고 있어요.
아델라를 초대하려는데.
밸런타인데이인데…….
그래 좀 그렇지, 오늘은?
최근에 아델라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그녀를 혼자 두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밸런타인데이에 남편의 여자 친구를 초대하는 것도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처음 폴란드에 왔을 때, 요니는 마음의 병을 앓았다. 루프스가 소홀한 것도 아닌데, 알 수 없는 외로움은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향수병에 걸려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 밖으로 끌어내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준 게 아델라였다. 폴란드어 학교를 알아봐 준 것도 아델라였다. 밸런타인데이에 아델라를 혼자 두자니 마음에 걸렸다.
아니, 괜찮아요. 저녁에 오라고 해요.
요니는 막 전화를 끊으려는 루프스에게 서둘러 외쳤다.
어어, 소리치지 말라고.
루프스가 장난처럼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요니는 그대로 무선전화기를 들고 앉아 있었다. 다른 손에는 푸른색 종이를 들고. 현관에는 고기와 채소 같은 저녁거리가 든 비닐봉지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델라는 루프스의 동네 친구다. 그들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 다녔다. 대학에서 루프스는 수학을, 아델라는 회계를 전공했다. 요니는 두 사람이 비슷한 전공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둘 다 숫자를 다루는 거였으니까.
대학을 졸업한 아델라는 루프스보다 먼저 영국에 직장을 잡아 떠났다. 루프스는 아델라를 만나러 두어 번 영국에 갔었다. 그때마다 아델라는 휴가를 내 루프스와 함께 여행했다. 요니는 그들이 같이 여행한 사진들을 루프스와 함께 본적이 있다. 결혼하고 같이 살면서 몇몇 사진은 앨범에, 몇몇 사진은 난로 위와 벽에 걸었다. 그와 사귀며 아델라를 알게 됐지만 그녀는 요니의 친구이기도 했다.
초콜릿을 좀 더 사야겠어.
허공에 누군가와 대화하듯 그녀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그러고도 그녀는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는 김에 아델라에게 줄 밸런타인데이 카드도 사야겠어.
빠트린 쇼핑목록이 기억난 듯 그녀는 중얼거렸다.
여보세요.
벨소리에 놀란 요니가 들고 있던 전화기를 귀에 댔다. 그래도 벨은 계속 울렸다. 인터넷 전화였다. 요니는 일어나 벽난로 위에 놓인 인터넷 전화를 받았다. 중학교 친구인 지수였다. 요니는 전화를 받으며 벽난로 위에 액자를 처음 보는 것처럼 구경했다. 사진들 가운데 결혼사진이 있었다. 한국 전통 혼례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루프스 머리 위에 모자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걸 여태 몰랐다니. 요니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들 결혼에 큰 흠이라도 발견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얘,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
지수는 남편의 대학 동기 모임에 대해 말했다. 결혼 전부터 가져온 모임이지만 남편이 모임에 나가는 걸 지수는 좋아하지 않았다. 가끔 부부 동반으로 모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남편 혼자 나가는 모임이었다. 여러 해 얼굴을 보아온 터라 지수도 남편의 동기들과 가까웠다. 그런데 최근 그 동기 중 하나가 이혼한 사실이 걸린다고 했다.
너도 잘 알다시피 우리 신랑이 친절하잖아. 내가 거기 반해서 결혼한 거고.
맞아, 성우 씨가 친절하지.
건성으로 답하며 벽난로 위에 사진들을 톺아봤다. 거기에는 루프스와 아델라의 사진도 있었다. 아델라는 희고 가느다란 팔을 루프스의 어깨 위에 올리고 그에게 반쯤 기울어져 있었다. 아델라는 언제나 귀가 훤히 보이는 짧은 머리 스타일을 했는데, 그녀의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잘 어울렸다. 밝은 회색빛이 도는 금발인 그녀의 머리카락은 신비로운 초록 눈동자를 더 돋보이게 했다. 환하게 웃는 그들 뒤로 대성당이 보였다. 유럽 어디에나 있는 그런 성당이었다. 뾰족하게 솟은 작은 지붕과 그 위에 금빛으로 빛나는 첨탑과 풍향계. 성서를 들거나 횃불을 든 조각상이 촘촘히 돋을새김 된 건물의 외곽.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와 그녀를 호위하는 천사들. 처음엔 신기하고 아름다웠지만 자꾸 보니 감흥을 잃게 되는, 유럽 어디에나 있는 그저 그렇고 그런 성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