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
“네덜란드엔 뭐가 있지?”
내가 처음 네덜란드에서 살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이다. 아마 나는 “튤립과 풍차?”라고 얼버무렸던 것 같다. 사실 네덜란드에 와서 놀란 건 평일에는 모든 가게가 6시면 닫았고 일요일에도 여는 가게가 없다는 거였다. 물론, 지금은 나아져서 일요일에 문을 닫는 가게를 찾기 어렵지만, 십오 년 전에는 그랬다.
라파엘과 나는 2년쯤 장거리 연애를 했다.
그가 일본에서 근무할 때 내가 찾아가기도 했고, 그가 한국에 오기도 하며 서로를 조금씩 알아갔다. 우리가 네덜란드에 자리를 잡은 건 단순한 이유였다. 나는 아직 뚜렷한 직업이 없었고, 그의 일은 안정적이었다. 한편으론 나는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었고, 그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일도 하고 여행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이상적인가.
우리는 우선 동거를 시작했고, 처음 5년은 중국과 일본, 한국 등지를 오가며 살았다. 몇 달에 한 번씩 짐을 싸서 네덜란드 집에 들렀다가 다시 일본이나 중국으로 돌아가 호텔 생활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어느 순간 ‘집’이 그리워졌다. 가족이 있는 집이 아니라, 그저 고정된 장소. 집에서 빨래하고, 집에서 밥을 지어먹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 간절해졌다.
그 무렵 우리가 살던 네덜란드 집은 방 하나에 부엌 겸 거실이 딸린 스튜디오였다. 거기서 지내든 아니든 매달 1500유로를 냈다. 우리는 6개월은 네덜란드에서, 6개월은 다른 나라에서 지냈다. 스튜디오는 에인트호번 시내에 있어 여행하기엔 좋았지만, ‘이 나라에 살고 있다’는 실감은 들지 않았다. 그는 유럽인답게 월세로 평생을 살아도 괜찮다고 했고, 나는 그 돈이 아까웠다. 내 집에 대한 로망이 그렇게 강했다는 걸, 그와의 대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어쩔 수 없이 나도 한국인이었다.
그전까진 집이나 차를 사는데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글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 하나로 대학원을 다니고, 단기 알바를 하거나 어머니 식당 일을 도우며 살아왔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어차피 벌어도, 안 벌어도 마이너스 인생이었고 그렇다면 적게 벌면서 원하는 걸 하자고 마음먹었다.
결국 우리는 많은 대화 끝에, 네덜란드에 집을 사기로 했다. 수십 군데를 보러 다녔고, 크기와 가격을 가리지 않고 모든 옵션을 검토했다. 그러다 에인트호번 시내에서 차로 십오 분쯤 떨어진 신도시의 미분양 아파트를 선택했다. 운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당시 집값은 바닥을 찍고 서서히 오르는 중이었고, 우리는 시공사에 가격을 깎는 배짱을 부리며 첫 집을 장만했으니까.
그리고 다시 많은 대화 끝에, 우리는 아이를 갖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아이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때 나는 서른일곱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건 생리적 한계를 느껴서였던 것 같다.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아이 없이 둘이서만 지낼 수 있을까.
한평생을 우리 둘이서만? 괜찮을까?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홈닥터를 찾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물었다.(네덜란드에서는 전문의를 만나기 전에 무조건 가정의를 먼저 만나야 한다.) 네덜란드에서 의사를 만나려면 보통 이 주를 기다려야 하는데, 난임 관련 진료는 놀랍게도 빠르게 진행됐다. 이 이야기는 다음 연재에서 자세히 풀어보려 한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아들을 품에 안았다. 그때 서른여덟이었다. 여러 나라를 오가며 나름의 경험도 많이 쌓았고,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했지만, 엄마가 되는 일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자연 출산을 권장하는 네덜란드에서의 출산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 낯설기만 했다. 언니도 셋을 모두 제왕절개로 낳은 터라 나도 그럴 줄 알았다.
더구나 나는 피부에 문제도 있었고 그래서 37주에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리고 노산이었으니까. 당연히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을거라 기대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불안해하는 내게 “너는 건강한 여자야.”라고 지속적으로 말했다. 나는 전혀 건강하지 않은 기분이었는데도,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장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들의 건강한 여자라는 주술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
출산이 끝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폴란드 아빠와 한국인 엄마,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사는 루이는 배워야 하는 언어가 네 개나 됐다.
폴란드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루이는 영어를 자연스럽게 공용어로 받아들였다. 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엄마의 언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루이는 한국어를 알아듣지만 발음하는 걸 어려워했다.
네 살에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네덜란드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학교에 가면서 처음으로 네덜란드어 환경에 노출됐고, 그때부터 루이와 내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어느 날, 내 네덜란드 지인이 나를 보고 말했다.
“넌 진짜 전사 같아.”
루이를 위해 학교와 홀로 맞서 싸우는 내 모습이 용감하면서도 안쓰러웠다고 했다. 나는 작은 불씨도 놓치지 않으려는 예민한 엄마가 돼 있었다. 루이의 친구 문제, 선생님들이 오해한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그 일을 연구하고 공부했다. 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이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루이뿐이었기에, 나는 그 아이의 말을 어루만지고 다독이며 그날의 사건을 캐내는 것부터 하루를 시작했다.
‘네덜란드에서 엄마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