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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 아이 낳기

풍선으로 유도 분만을?

by 명희진

인공 수정을 하고 거의 4주 만에 임신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빨리 임신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새해에 혹시 하는 마음에 임신 테스트를 했는데, 희미하게 두 줄이 떴다. 믿을 수 없어 다시 확인했고 다시 두 줄이었다.


폴란드에서 피검사를 했는데, 그곳 연구원이 임신이 확실하다며 미리 축하한다고 했다. 네덜란드로 돌아와 병원에 연락했다.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임신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 아마도 내 목소리는 조금 들떠 있지 않았을까.

"아직 판단하긴 일러요. 몇 주 후에 다시 연락해요."

초음파를 할 수 없느냐는 질문에 수화기 속 목소리는 나의 무지를 살짝 비웃는 듯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아직 이르다고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임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알기에 6주는 빨랐다. 임신 8주에 접어들어서 우리는 초음파로 태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들인 걸 알았다. 루이는 소위 말하는 쩍벌남이었다. 지금도 잘 때 발과 발을 맞대 붙이고 자는데, 그게 태아 때 습관인 것 같다. 의사는 아이의 성별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고 했지만, 우리 모두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임신 기간 내내 루이는 얼굴은 항상 팔로 가리고 있으면서 자신의 성별은 확고하게 드러냈다.


미드와이프(산 파제) 제도가 있는 네덜란드에서는 임신 기간 중에 단 한 번의 초음파를 받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의사는 내게 미드와이프를 연결해 줄지를 물었고 나는 모든 과정을, 병원을 통해서 하겠다고 말했다. 임신 기간 중에 총 세 번의 초음파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나는 이게 많은 양이라는 걸 다른 네덜란드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알았다.


임신 기간은 대체로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고기를 못 먹는 입덧을 하긴 했지만, 생활에 지장이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루이는 내게 자꾸 청소를 시켰다. 나는 집안을 쓸고 닦고 정리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을 참기 힘들었다. 출산하러 가는 마지막까지도 욕조 청소를 할 정도였으니 말해 뭐할까. 그냥 청소한 게 아니라 솔로 닦아 물을 뿌린 후 마른 수건으로 닦아 윤을 냈다. 더러운 빨래가 눈에 보이지 않게 모두 빨아 개워 정리해 서랍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마룻바닥에 고양이 털이 있지 않게 청소기를 돌리고 닦았다. 살면서 할 수 있는 청소를 그때 다한 것 같다.




30주가 넘기 전에 배에 빨간 여드름 같은 것이 오돌토돌했다. 의사에게 보여줬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게 문제였다. 발진이 퍼지는 데는 이 주가 걸리지 않았다. 나는 피가 날 때까지 몸을 긁었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었다. 옷을 걸칠 수 없어 면으로 된 얇은 잠옷 하나만을 입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생오이를 얇게 잘라 온몸에 붙였다. 나는 비로서 성경에 [욥기]에 나오는 욥을 이해하게 됐다. 기왓장으로 몸을 긁었다고 했나. 기왓장이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의사는 임신 소양증이라며 임산부가 쓸 수 있는 스테로이드를 처방해줬다. 약을 발라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얼굴을 제외한 온몸에 발갛게 발진이 올랐다. 손등이며 팔, 다리 같은 곳은 하도 긁어 붉게 붓고 피딱지가 앉았다. 36주에 의사는 아이가 충분히 크니 유도분만을 하자고 했다. 이때 똑바로 앉아서 태연하게 자기 손가락을 빠는 루이를 돌리는 작업이 있었다. 동양인 의사가 나타나 초음파로 태아의 상태를 확인하며 손으로 배를 잡고 돌리자 거짓말처럼 태아의 위치가 바꼈다. 다시 돌아가면 출산 전에 상황을 봐서 한번 더 돌리자고 했다.




당시 나는 잠을 거의 못 자고 있었고 의사는 내 상황이 걱정된다고 했다. 나는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4주를 더 버티기로 했다. 의사에게 전화가 왔다. 빨리 입원해서 아이를 낳자고 그녀가 말했고(나는 소양증을 가벼이 여긴 전 의사를 믿을 수 없어 담당의를 바꿨다.) 간지러움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울면서 오이를 자르고 있던 나는 3주만 더 버텨보겠다고 훌쩍였다.

"당장 와요. 엄마가 괴로우면 아이가 뱃속에서 편하겠어요?"

의사의 이 한마디는 실로 강렬해서 당장 짐을 싸서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는 내게 진정제와 수면제를 투여했다. 그때부터 내리 이틀을 잠만 잤다. 잠깐 일어나 밥을 먹고 다시 잠들고 일어나 밥을 먹고 다시 잠들었다. 내가 조금 안정되자, 의사가 네덜란드에서 유도분만에 대해 설명했다. 풍선을 삽입해 질 입구를 넓힌 다고 했다.

"에에? 풍선을?"

나는 정말 이렇게 말했다. 풍선과 소변 줄을 넣고 질 입구가 4센티까지 열리길 기다렸다. 그 사이에 분만 촉진제도 맞았다. 이 기억은 사실 희미해서 잘 모르겠다. 4센티가 열리고 풍선을 뺐다. 간호사가 손으로 양수를 터트렸다. 나는 이 지점이 실수였다고 생각하지만, 의료 상식이 미비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질 입구는 4센티에서 조금 도 더 열리지 않고 진통은 시작됐다. 온몸이 떨리고 하혈했다. 이때부터 조금 두려웠던 것 같다. 아이를 낳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시간이 흘러도 질 입구는 열리지 않았다. 간호사는 당시 나의 고통 수치가 출산 마지막 단계라고 말했고 무통주사(에피도럴)를 맞을 건지 물었다. 이 상황에서 눈치 없는 라파엘은 무통주사가 부작용이 많다며 이에 부정적인 시선을 내비치며 '무통주사 부작용'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간호사와 내 눈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간호사가 "당신은 산모의 고통을 몰라요!"라고 말했고 나는 간호사의 든든한 지지로 무통주사를 맞았다. 그런데도 통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자정이 가까워졌고 그들도 조금 두려웠던 것 같다. 하혈을 계속하고 있었기때문이다. 이가 부딪힐 정도로 온몸이 떨렸다. 금발의 간호사가 내 손을 잡아줬고 나는 뭔가 잘못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의사 교체가 있기 전에 서둘러 수술 동의서를 받고 밤 11시 40분에 수술실로 들어갔다. 루이는 8월 30일 11시 56분에 태어났다.





어떤 산모는 수술하면 배가 당겨 너무 아프다는데, 나는 오히려 시원했다. 그 전에 출산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제왕절개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하필 그날은 병원에 신생아가 많아 나는 간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네덜란드는 아이를 낳자마자 산모에게 넘긴다. 출산 직후의 엄마가 온전히 아이를 돌봐야한다. 자연분만이었다면 세 시간 안에 아이와 함께 집으로 보내진다. 신생아실에 가는 아이들은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네덜란드에는 한국처럼 산후 조리나 산후 조리원 같은 것은 없다. 대신 크람조르그(kramzorg)가 있는데, 출산 도우미 같은 거다. 출산을 하자마자 등록된 크람조르그 회사에 연락을 하고 집에 도착하는 시간을 알려주면 배정된 크람조르그가 집으로 온다. 한국으로 치면 출산도우미 같은 거다. 아이를 돌보는 전반적인 일과 집안 일을 도와준다. 샌드위치 같은 간단한 음식도 만들어준다.

루이의 침대는 내 침대 옆에 있었다. 아이가 울 때마다 일어나 기저귀를 확인하고 갈아줬다. 너무 작고 연약한 생명체가 38주 만에 나와 분리돼 바깥 세상에 나와있었다. 아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작고 연약해 보여 신기하면서도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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