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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 아이 갖기

실명 위기에 찾아온 태몽

by 명희진

우리가 함께 사는 내내, 우리는 결혼과 아이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았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만큼이었지만, 기간이 쌓이다 보니 은근 '아이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마치 이민을 고려하며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듯, 딱 그만큼의 고민이었다.


라파엘과 내가 함께 할 거면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어른들의 충고가 있었고 나도 함께 살 거면 아이가 있는 게 맞다는 쪽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딩크족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고 라파엘은 결혼과 아이에 대해 고민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우리 사이가 달라졌을까?


그때 우리는 어디에, 정확히는 어느 나라에 살지도 정하지 않았고 평생을 서로 함께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아마, 전자보다는 후자가 결정을 못하는 강력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연인이건 부부건 살다가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고 적어도 나는 생각했다. 나중에 대화를 통해 안 사실은, 라파엘은 헤어짐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는 단지 현재 우리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정말 단순하게 그뿐이었다. 다른 걸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삶.... 이 문제로도 우리는 꽤 다른 의견 차이를 보였다.




어쨌든 아파트를 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파엘의 한쪽 눈이 아팠다. 한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우리는 이제 막 아파트를 사서 커다란 공사를 끝낸 후였다. 그때까지도 담당 가정의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오래전 다니던 동네 병원에 연락했고 역시 의사는 아무런 처방도 하지 않았다.


며칠을 보다가 안 되겠어서 응급실에 연락했다. 의사가 보더니 심각하다며 바로 전문의에게 보내줬다. 실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각막을 다쳤는데, 어디서 어떻게 다쳤는지도 몰랐다. 라파엘은 회사 주차장에서 먼지가 들어간 것 같다고 했지만 확실하진 않다. 매일 병원에서 집으로 항생제를 보내줬다. 바로 받아서 바로 써야 하는 거여서 초기에는 하루에 두 번을 병원에서 택시로 집까지 보내줬다.

의사는 하루만 늦었어도 바로 실명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거의 1년 정도를 병원에 다녔다.


어쨌든 이 기간에 우리는 조금 힘들었던 것 같다. 안구 적출 같은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오가던 시점이었고 그의 한쪽 눈은 완전히 시력을 잃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나는 영어로 들어야 했다. 어떤 단어는 그냥 음성일 뿐으로 그 심각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답답했다. 의사와 대화를 녹음하고 이를 다시 듣고 내 언어로 만드는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점점 지쳐갔다. 그를 이렇게 계속 돌보며 살 수 있을지 걱정됐다. 상처 부위가 시야를 가리고 있어 특별한 렌즈를 껴야 한다고 했다. 그 렌즈를 끼는 연습을 하던 중에 상처 부위가 시야 밑으로 내려가는 기적이 생겼고 그의 시력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의사는 기적이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치료가 효과를 봤다고 기뻐했다. 사실 그가 한 일은 별로 없었다. 그는 내내 우리에게 이제 그만 포기하고 각막렌즈를 끼는 일에 익숙해지라고 했을 뿐이었다. 혹은 눈 이식을 고려할 수 있다는 말도 했었다.


그냥 이건 우리만의 추측이지만, 아로니아를 먹은 게 상처 부위를 조금 줄여준 것 같다. 아로니아 판매를 염두에 둔 말은 아니지만, 그 한 달간 아로니아를 열심히 챙겨 먹은 것 말고는 한 게 정말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쯤 아이를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둘이 새 아파트에 머무는 게 조금 지칠 때였다.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터닝포인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린 이미 부모가 되기에 늙었다는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이를 낳아도 아이가 스물 일 때는 우리 둘 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였다. 오랜 대화 끝에 우린 아이를 갖자는 데는 동의했다...... 그런데 아이가 안 생겼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우리도 우리는 다를 거라 생각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아이가 짠 하고 생길 줄 알았다.


우린 병원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의사는 우리가 난임부부라고 했다. 일 년 이상 자연관계로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난임에 속한다나.

느린 네덜란드에서도 난임부부 지원은 꽤 체계적이고 빨랐다. 일단,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 인지를 알아볼 여러 가지 검사들이 이어졌다. 피검사, 성병 검사와 나팔관 조영술 같은 검사들을 받았다. 라파엘보다는 내가 할 일이 많았다.


네덜란드에서는 난임부부에게 4번의 인공수정과 2번의 실험관 시술을 보험으로 제공했다. 이후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는 내 질문에 의사는 다른 방법을 찾거나 입양이라고 했다.

모든 설명을 듣고 모든 준비가 끝난 후에 퓨레곤 과배란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하루에 정해진 양을 맞는 식이었다. 솔직히 과배란 주사까지 맞는데, 한 번에 되겠지 생각했다. 삼 주간 주사를 맞고 배란일에 맞춰서 날짜를 잡고 의사를 만나는 걸 세 번을 했다. 모든 과정은 순조로웠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 말고는.


앞서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이, 네 번째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모든 게 허술했다. 내 몸은 엉망이었고 의사는 크리스마스 휴가 중이었다. 간호사는 친절했지만 서툼을 감추려는 친절처럼 모든 일에 삐걱댔다. 모든 게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신발을 신는데, 수정액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때 차에 타며 나는 라파엘에게 "아무래도 망한 것 같아."라고 말했던 것 같다. 정말 망한 것 같았다.




엄마는 누구보다 내가 아이를 갖길 바랐다. 집안에 항상 한 명 씩 아이 없는 어른들이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될까 봐 겁난다고 했다. 무속인을 찾아가 내 삶에 아이가 있는지 같은 것들을 묻고 뭔가 비방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내게 정말 힘들게 아이 하나가 있다고 하며 엄마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오랫동안 알고 지낸 무속인이 엄마에게 전화했다. 지금, 삼신할머니가 아이를 점지해 줄 것 같아 빌어야 한다고. 하필 우리가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는 시기에 삼신할머니는 내게 아이를 점지해 주고 싶었고 엄마는 쌈짓돈을 털어 뭔가를 했다.


우스운 얘기지만 이즈음 정말 태몽 같은 태몽을 꿨다. 그 시기가 정확히 겹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즈음인 건 맞다. 루이가 생겼으니까.

내 꿈에서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 돈다발을 주고 갔다. 오래전 헤어진 남자가 나타나 울면서 돈다발을 줬고 내게 아이를 잘 키우라고 했다. 잠에서 깨어나 어안이 벙벙했다. 아버지는 이해가 가는데, 헤어진 연인은 뭐란 말인가.


그 후로도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나타나 내 손에 뭔가를 쥐어주고 갔다. 설상가상으로 라파엘은 우리 아이가 나타나 "아빠, 내가 너무 오래 기다렸어. 도대체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라고 했다고 말했다. 나는 궁금증에 "여자야? 남자야?"하고 물었고 라파엘은 "남자아이였어."라고 했다.


세 번의 인공수정에 실패하면서도 꿈을 꿨다. 많은 꿈을 꿨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말 꿈이었다. 한 무리의 말이 영화에서처럼 갈퀴를 휘날리며 내게로 달려왔다. 나를 짓이겨 더 멀리 달리겠다는 듯이. 너무 무서워서 몸을 살짝 옆으로 피했다. 꿈에서 깨고 나서 나는 그 말들을 피한 걸 후회했다. 어쩌자고 그 말들을 피했을까, 같은 자책도 했던 것 같다.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떨 때는 다잡은 물고기를 놓아줬다. 왜 하필 그 순간 인류애가 넘쳤는지 모르겠다. 내 품에서 팔딱 대는 물고기를 푸른 바다로 방사했다. 멀어지는 물고기에게 잘살라고 손까지 흔들어줬다.


수정액을 넣고 며칠 후에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시댁인 폴란드로 가고 있었다. 오래된 한국 가요도 듣고 그가 좋아하는 록음악을 들어도 시간은 쉽게 가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폴란드 시댁까지는 총 11시간이 걸린다. 거리로는 1200km다. 할 일도 없고 심심하던 찰나에 우리는 딩크족이 되는 것에 대해 진진하게 토론했다. 라파엘도 딱히 거부하는 것 같진 않았다.

두 번째 인공수정이 실패했을 때, 나는 고양이를 한 마리 입양했다. 그 아이에게 삼총사에 기사 중 한 명인 아토스라는 이름을 줬다. 진회색에 노란 눈동자를 한 브리티쉬 종의 아토스는 내게 아이와는 다른 기쁨을 줬다.


시크한 브리티쉬 고양이와 딩크족 국제 부부, 뭔가 그럴듯했다. 딩크족이 뭔지도 몰랐는데, 난임시술 몇 개월 만에 딩크족을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이왕이면 자발적 딩크족처럼 보이고 싶었나 보다. 우리는 쿨한 척 웃었고 상대의 분위기를 살폈고 그럴수록 우리가 어느새 아이를 깊이 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이 글은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인 기록입니다. 다양한 선택과 감정이 존재한다는 점을 존중하며, 특정 삶의 방식을 희화하거나 일반화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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