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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시인을 구원하는 것

류시화 시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by 따시

아직 꽃 피우지 않은,

나무가 안으로 준비하고 있는 꽃들이

그 나무의 오늘을 지탱해 주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 나무의 내일을 구원하리라는 것을

시인도 그렇다

아마도 모두가 그럴지도 모른다

-류시화 시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부분


내일을 꿈꾸는 사람은 오늘을 함부로 살지 않는다. 자신 안에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은 시간을 소비하지 못한다. 시인은 한 순간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속내에는 “아직 꽃 피우지 않은, 침묵으로 준비하고 있는 시들이”있다. 그것들이 어떤 꽃으로 피어날는지 시인 자신도 알지 못한다. 어떤 것은 일찍 피어나고 어떤 것은 오래도록 씨앗으로만 남아있다.

봄이 되니 겨우내 추운 바람에도 끄떡않고 버텨내던 갈대가 몸을 눕힌다. 다음 세대에 자리를 넘겨줄 때가 왔음을 알고 있는 거다. 버석거리는 갈대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뿌리 깊숙이에서 태동하는 푸른 싹이다. 릴레이 선수가 바톤을 넘겨주듯 갈대는 푸른 새잎에 자리를 넘겨주고서야 소리없이 눕는다. 겨우내 죽은듯 서 있던 나뭇가지가 아주 희미하게 푸른빛을 보인다. 태동을 하는 것이다. 마른 가지에 오종종 버들강아지가 피어난다.

작가의 시작은 책을 읽는 것이다. 책읽기와 꾸준한 쓰기가 작가를 만들어내는 토양이다. 물은 그릇에 차야 넘친다. 읽은 것이 넘치면 글이 된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나무는 겨울동안 무엇을 할까? 강한 바람의 힘을 빌려 약한 가지들을 잘라버린다. 남은 가지들은 더 단단하게 굵어진다. 뿌리는 바람에 흔들리며 땅속에 굳건하게 다져지고 눈속에서도 얼지 않는다. 모진 추위를 견딘 생물은 강하다. 강하게 살아남은 나무라야 봄을 맞을 수 있다. 겨우내 비워둔 내장에 흠뻑 양분을 빨아들이고 한꺼번에 잎을 틔운다.

그렇게 피어나는 잎들이 겨울동안 나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증명해준다.

시인의 “내일을 구원”하는 것은 침묵이다. 시인은 침묵으로 봄을 위한 준비를 한다. 멋진 꽃을 피우기 위해, 예쁜 이파리를 써내기 위해 단어들을 키우고 있는 거다. 그렇게 준비된 언어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며 봄의 꽃같은 시 하나 만들어 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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