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겠어요.'
'그렇지. 아직은 모를수 있어. 선생님이 잠시 어디 갔다올 동안 생각해볼래?'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나에게 석우는 '부러웠어요.'라고 말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읽어낸 석우를 칭찬하며 부러움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라 말해주었다. 어른도, 심지어 선생님도 갖고 있다고. 너와 같은 상황이면 회장에 당선된 친구를 보았을때 충분히 부러웠을 거라고. 하지만 부러움이 전처럼 친구를 공격하는데 쓰이면 안된다고도 단단히 일러두었다. 공약 언제지킬거냐는 질문이 그 친구에겐 큰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왔을 거라고도.
옆반 선생님과 내가 마련한 사과의 장에서 석우는 더 큰 용기를 보여주었다. 나와 상담할때, 네 부러움은 너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도 말해주었다. 꼭 상대에게 밝힐 필요는 없다고. 그냥 너만 너의 감정을 알아주면 된다고 했는데 석우는 진심어린 사과를 하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네가 부러웠어. 나는 선거에서 떨어졌는데 너는 당선되어서.'
굉장히 훌륭한 인품을 가지신 옆반 선생님은 석우의 그 점을 놓치지 않고 크게 칭찬하셨다.
'우와 너 참 멋있는 아이다! 부러웠다는 말을 꺼내는건 쉽지 않은데 참 용기있네.'
옆반 친구와 석우는 비로소 개운한 표정이 되었다.
부러움이 뾰족한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장면을 흔하게 본다. 언젠가는 한 여학생이 울상을 하며 내게 와서는 '기원이가 저희 보고 아이* 쓴다고 매국노라고 놀려요.'이라고 했다. 놀렸다는 그 말이 포털사이트의 저질 댓글과 크게 다르지 않아 경악하며 기원이를 불렀는데 기원이는 아이* 쓰는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털어놓았다. 누나는 아이*을 쓰는데 아빠가 제게는 갤**를 사줘서 항상 그 억울함이 있었다고. 앞서 든 사례처럼 아이들은 제 부러움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어쩔줄 몰라하다가 대개 친구와의 관계를 망치고, 자기의 속도 잔뜩 상하게 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부러움을 바라보고 인정한다.
솔직히 말해서 어디 아이들 뿐이겠는가. 나는 뭐 부러움을 아주 노련하게 다루는가 자문한다면 사실 할 말이 없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가리지 않고 부러워서 잠못 이룬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부러운 분야도 아주 다양하다. 좋은 집, 좋은 차는 물론이고 아이 식판을 다채롭게 채워주는 엄마들, 학생들과 관계가 아주 좋아보이는 선생님들... 나만 뒤쳐지는것 같아서 뾰족해졌던 순간이 내가 기억하든 못하든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