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pplepie Nov 03. 2022

부러움이 그저 부러움이 되도록

 바쁜 아침시간, 출근 후 소란한 교실을 정리하고 있는데 옆반 선생님이 노크를 하셨다.

 '저기, 바빠? 잠깐 얘기할 게 있어서. 혹시 석우라는 애 어때? 우리반 학생이 얘 때문에 힘들다고 하네.'


 사연인즉슨, 이번에 전교회장에 당선된 옆반 아이가 우리반 석우와 같은 학원에 다니는데 석우는 마주칠때마다 집요하게 묻는다는 것이었다.

'너 공약은 언제 지킬거야?언젠가는 지키겠지?'라고. 심지어는 '공약도 안지키는 회장'이라거나 야비하게 신체의 약점을 잡아 놀리기도 한댔다. 한 두번이라야 듣고 넘기지 학원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런다니, 그 학생 정말 귀찮고 힘들었겠다 싶었다. 동시에 느낌이 좀 오는 듯했다. 원인이 된 석우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건 왠지 쉬울 것 같았다그 감정은 아마도 '부러움'일 것이었다.


 목소리가 크고 자신감이 넘치는 석우는 1학기부터 2번의 전교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연거푸 실패의 쓴 맛을 보았다. 아무리 밝은 아이더라도 두번의 실패는 힘들었을 것이다. 선거는 9월에 있었지만 석우는 아직도 그때의 좌절감과 당선된 아이를 보며 드는 부러움을 잘 소화해내고 있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하며 석우와 대화해 보았다. 사실관계를 확인한 다음, 시인하는 석우에게 좀 전보다 더 다정하게 물었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행동할때 어떤 감정이 들었어? 어떤 감정이 널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모르겠어요.'

'그렇지. 아직은 모를수 있어. 선생님이 잠시 어디 갔다올 동안 생각해볼래?'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나에게 석우는 '부러웠어요.'라고 말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읽어낸 석우를 칭찬하며 부러움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라 말해주었다. 어른도, 심지어 선생님도 갖고 있다고. 너와 같은 상황이면 회장에 당선된 친구를 보았을때 충분히 부러웠을 거라고. 하지만 부러움이 전처럼 친구를 공격하는데 쓰이면 안된다고도 단단히 일러두었다. 공약 언제지킬거냐는 질문이 그 친구에겐 큰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왔을 거라고도.


 옆반 선생님과 내가 마련한 사과의 장에서 석우는 더 큰 용기를 보여주었다. 나와 상담할때, 네 부러움은 너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도 말해주었다. 꼭 상대에게 밝힐 필요는 없다고. 그냥 너만 너의 감정을 알아주면 된다고 했는데 석우는 진심어린 사과를 하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네가 부러웠어. 나는 선거에서 떨어졌는데 너는 당선되어서.'

굉장히 훌륭한 인품을 가지신 옆반 선생님은 석우의 그 점을 놓치지 않고 크게 칭찬하셨다. 

'우와 너 참 멋있는 아이다! 부러웠다는 말을 꺼내는건 쉽지 않은데 참 용기있네.'

옆반 친구와 석우는 비로소 개운한 표정이 되었다.


 부러움이 뾰족한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장면을 흔하게 본다. 언젠가는 한 여학생이 울상을 하며 내게 와서는 '기원이가 저희 보고 아이* 쓴다고 매국노라고 놀려요.'이라고 했다. 놀렸다는 그 말이 포털사이트의 저질 댓글과 크게 다르지 않아 경악하며 기원이를 불렀는데 기원이는 아이* 쓰는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털어놓았다. 누나는 아이*을 쓰는데 아빠가 제게는 갤**를 사줘서 항상 그 억울함이 있었다고. 앞서 든 사례처럼 아이들은 제 부러움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어쩔줄 몰라하다가 대개 친구와의 관계를 망치고, 자기의 속도 잔뜩 상하게 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부러움을 바라보고 인정한다.


 솔직히 말해서 어디 아이들 뿐이겠는가. 나는 뭐 부러움을 아주 노련하게 다루는가 자문한다면 사실 할 말이 없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가리지 않고 부러워서 잠못 이룬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부러운 분야도 아주 다양하다. 좋은 집, 좋은 차는 물론이고 아이 식판을 다채롭게 채워주는 엄마들, 학생들과 관계가 아주 좋아보이는 선생님들... 나만 뒤쳐지는것 같아서 뾰족해졌던 순간이 내가 기억하든 못하든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건 아이들은 나보다 마음이 덜 꼬여서, 내가 아이들보다는 더 많은 날들을 경험해서 아이들의 소화시키지 못한 부러움이 생생하게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부러움에서 완전히 구하진 못하지만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나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조금 더 들여다 볼수 있을 것 같아 작은 위안을 얻는다.

이전 04화 목요일 세 여교사의 조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