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학생이 체험학습 신청서를 건넸다.
"선생님, 저 목, 금에 체험학습 가요. 그래서 방학식을 하지 못해요."
가뜩이나 학기 말에 해야할 일로 분주했던 나는,
"어. 그럼 교과서 버리는 날엔 다른 친구가 도와줄 수 있도록 헌 교과서를 미리 꺼내놓을래?" 라고만 말했다. 잠시 후, 학생이 명랑한 얼굴로 다시 내게 와, "승기가 도와주기로 했어요."라고 말했고 나는 잘했다고 하고 잊었다.
오늘 다시 그 학생이 내게 와 내일부터 자신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작별인사조차 건네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님 저 내일...'이라고 그 아이가 말하는 순간 며칠 전에 이미 생각했어야 할 것이 (늦었지만 다행히도) 떠올랐다. 학생의 통지표와 방학 안내문을 챙겨 봉투에 담고 개학식 안내를 했다. 그리고 나서 아이들을 앉힌 후 말했다.
"얘들아, 선혁이는 내일과 모레 여행을 가서 우리랑 지금 헤어져야 해. 우리반에서 선혁이를 보는게 지금이 마지막이네. 선혁아, 마지막 인사할래?"
늘 책임감이 강하고 명랑하여 나의 믿는 구석이었던 선혁이는, 평소답게 밝게 웃으며 짧게 인사했다.
"얘들아 안녕."
손까지 높게 흔드는 모습이 참 순수한 아이답다 싶던 순간, 선혁이가 자리에 앉아 엉엉 울었다. 이건 내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선혁이의 모습을 보니 학기 말 매뉴얼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같던 내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남녀를 가리지 않은 아이들 여럿이 선혁이를 안아주었다. 울지 마 선혁아. 내가 너 맛있는거 사줄게. 우리 1월에 동네에서 만나서 놀자.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게 뒤엉켰다.
고백하자면 어제까지 나는 올해 학급경영은 망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다고 굳게 믿었다. 이유는 많고 많았다. 12월까지 이렇게 착석이 안되는 아이들은 이제까지 어떤 학년이든 본 적이 없으며, 질서도 규범도 없었다. 아이들은 너무 거칠어서 하루가 멀다하고 싸웠고 너무 산만하여 수업에 집중시키는게 힘들었다. 올해는 망했으니 그냥 별일 없이 어서 마치자고 날마다 다짐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 우는 아이는 처음 봤던 것이다. 저 아이에게 우리 반과 나는 어떤 의미였을까, 내가 만든 학급이 내가 생각한 만큼 그리 엉망은 아니었나.
"선혁이는 참 마음이 따뜻하네." 라고 토닥이며 나도 아이들을 다시 눈에 담았다.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건 힘들지만 몸을 움직이는 심부름은 서로 하겠다고 줄을 길게 서던 아이들, 쉬는 시간에 뒤엉켜서 쫓고 쫓기는 놀이를 해서 나를 화나게 했지만 역시 뒤엉켜서 우는 친구를 달래주는 아이들을.
선혁이의 눈물 덕분에 나의 일년이 뒤늦게지만 따뜻해졌다. 모르고 지나쳐버렸을 보물을 이제야 주워 먼지를 탈탈 털어본다. 사실 올해 내가 너무 소진되어버렸다 느꼈고 그래서 휴직 생각마저 고개를 들던 차였다.
그래도 너희에게 나와 우리 반은 헤어지면 아쉽고 슬픈 존재가 되었구나, 이정도면 올해도 조금은 해냈구나 하는 뿌듯함. 그리고 어쩌면 내년에도 잘 될수도 있겠다는 작은 희망. 이 조그만 씨앗들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