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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plepie Aug 16. 2023

여섯 살, 학원을 다니지 않는 이유(1)

아이가 몇 개월에 걸었는지 기억나세요?

 아이가 어릴 적엔 네*버에 '7개월 발달' 같은 검색어를 입력해 다른 아이들의 발달 정도와 내 아이의 것을 비교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첫째이자 외동을 키우는데다 육아휴직을 해서 육아 외엔 달리 할일도 없었으니 내 관심은 온통 아이로만 쏠려 있었다. 게다가 K-학생으로, K-직장인으로 살면서 특출나진 못해도 뒤쳐지는 것엔 불안감이 있었던 나는 아이의 발달에 예민하게 촉수를 세웠다. 문제는 인터넷 세상에는 발달이 빠른 아이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이다.

'이 블로거 아이는 6개월에 잡고 섰다는데 왜 아직도 못 서지?'

'인스타 친구 딸은 돌잔치에 걸어서 입장했다는데 얜 못 하면 어쩌지?'

와 같은 불안감이 들던 때가 많았다. 지금에야 이것이 필요 없는 불안이요, 내 욕심이었음을 아주 잘 알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고 그저 아이의 발달이 뒤쳐지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기만 했다.


 시야가 좁아져 넓은 세상이 보이지 않을 때, 계속 좁은 공간만을 서성대고 있을 때엔 바깥 세상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 무렵 만났던 친한 언니는 나보다 4년 먼저 엄마가 된 육아 선배였다. 언니는 아이가 늦게 걸어서 고민이라는 내 말을 듣더니 가볍게 대답했다.

"야, 그때 걷는 건 걷는것도 아니야. 12개월이 걸어봤자 어차피 안고 다녀야 해. 세살쯤은 되어야 엄마가 편할 정도로 걸을 수 있어. 그때 1,2개월 일찍 걷고 늦게 걷는 건 의미 없어."

이 언니는 또 몇 년 후, 주위 아이들은 한글을 알아가는데 우리 애는 관심도 없다는 나의 불안에도 가볍게 응수했다.

 "그래. 너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 일에 전전긍긍할 때지."

공감이 결여된 이 말에 나는 살짝 민망하면서도 서운해졌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이 말을 곱씹으며 좁은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고로 이 언니는 내가 중심을 세우는 데 은인이 되어줬다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던 무렵부터일까, 복직을 하고 부터일까 과거의 나의 불안이 참 덧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한때는 신줏단지 모시듯 했던 그런 법칙들-아이가 언제 걸었는지, 언제 말을 했는지-은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찍 걸은 아이가 운동 천재는 아니었고 빨리 문장을 만들어 말을 재잘재잘 하던 아이가 늦게 말이 트인 아이보다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아이마다 시간표가 다를 뿐이었음을 누가 설명 안해줘도 너무나 잘 알겠던 순간이 왔다.


 지나고 나니 덧없더라 하는 것은 또 있었다. 영유아의 전집이나 교구 같은 것들이다. 우리 아이의 첫 전집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기백만원의 교구를 사주면 도움이 될지를 영아를 키우던 나는 역시 고민했었다. 그 당시 우리 부부의 수입은 결혼 후 최저를 달리고 있어 기십만원, 기백만원 하는 전집이나 교구를 사기 무리였다. 그러나 왠지 비싼 브랜드를 사주면 아이가 더 똑똑해질 것 같아서 그것들을 못 사주는 형편이 속상하고 불안하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쓸데없는 감정소모였다. 고가의 전집을 사든, 홈쇼핑에서 끼워팔기 하는 중저가 제품을 사든, 당근에서 몇 년 전 단종된 구형 중고를 사든 그런 것은 아이 발달에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젠 잘 알겠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셀프 깨달음에 더해, 나의 은인 언니께서 또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하사하셨다. 언니의 아이를 1학년에 입학시킨 해였다.

"지나고보니 유치원 때 학원 왜 그렇게 많이 보냈나 후회되더라. 돈이 너무 아까워."

물론 그 말에 덧붙여 "그런데 다시 돌아가도 한 군데 정도? %%는 보낼 것 같아." 라고 했지만. 중요한 것은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는 굳이 돈이나 시간을 쓰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몹시 그리운 시절-아이가 내 품에 쏙 들어오고 아이를 번쩍 들어올리는 것이 가능했던-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를 솔솔 풍기는 아기를 쳐다보며 행복해 하기에만도 짧았던 그 시절에 아이의 발달로 쓸데없는 감정소모를 한 것이 후회되기에 언니의 말이 귀에 들어왔을지 모른다. 다시 말해 언니의 의견에 이미 동의하고 있었으므로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거다.


  물론 학원의 효과는 꽤 있을 것이다. '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당히 확실한 보장을 준다고 생각하기에 효과가 없을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 효과는 보내보지 않은 내가 미처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보이는 효과 또한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풋(학원)을 넣으면 아웃풋(효과)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나 여섯살(심지어 만으로는 다섯 살)은 아웃풋을 기대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아웃풋을 논하는 것은 아이나 부모로 하여금 피상적인 것에 집착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 나라이름이나 수도 외우기처럼 단순 암기에 집착하거나 문자를 빨리 떼는 것에 매달려서 아이에게 학습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기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공부라는 것은 이렇게 빨리 외우는 거구나, 혹은 우리 엄마 아빠는 내가 이렇게 하면 좋아하는구나 하는 잘못된 인식.(물론 유아를 대상으로 한 학원들이 암기를 가르치거나 하지 않는다는건 주변인들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이 어서 가고 싶어할 정도로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인 곳이 많다는 것도 들었다. 엄마가 중심을 잘 잡고 선별해서 보내며 아웃풋을 재촉하지 않는다면 학원의 긍정적인 효과를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영유에서 소수를 자처하며 여섯살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를 요약하자면 '길게 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다. 돌쟁이 아기에게 기백만원 하는 교구를 사주지 않은 것이 지금 와서는 잘했다 생각하는 것처럼, 빨리 걷는 아이에게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며 후회하는 것처럼. 나중엔 내 아이도 어쩔 수 없이 학원 여러군데를 전전하는 초등학생, 중학생이 될 지 모른다. 그때의 아이가 떠올리며 힘을 얻을 시절, 미래의 우리 가족이 그리워할 시절이 지금이 되기 위해서라도, 또 어쩌면 미래의 학원비 재원을 남겨 놓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아이의 스케쥴을 복잡하게 만들 때가 아직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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