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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고 괜찮은 것 말고 좋은 것, 적당히 말고 잘

건강검진이 일으킨 나비효과

by Applepie

올해 2월 말쯤, 홀수년생인 나는 건강검진을 예약했다. 타고나길 계획형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다년간의 워킹맘 생활은 나를 계획집착형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계획이 없이는 하루에 해야 할 일도 제대로 챙길 수 없는 것이 워킹맘 아니던가. 몇 번의 mbti 검사에도 흔들림 없이 istj가 나오는 나란 인간은 아이가 학교를 입학하기 전이 내가 마지막으로 맘 편히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예상했고 건강검진 비수기라는 2월에 여유있게 검진을 받았다. 시작은 그토록 계획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검사가 끝나고 의사 선생님께 내가 미리 예상하고 계획을 세우지 못한, 퍽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뇌혈관 mra에서 오른쪽 혈관이 좁아진 것이 보입니다. 소견서를 써드릴 테니 신경과 가보세요."

얼떨떨해 하는 나에게 선생님이 좀전보다 조금 따뜻한 목소리로 한마디 더 건네셨다.

"나이가 아직 젊은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요? 가정 스트레스인가요, 직장 스트레스인가요?"

당연히 직장이겠지, 생각하며 억울함이 울컥 치솟았다. 최근 몇 년간 교직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는데 그때마다 검진 결과가 좋지 않았다. 위용종에서 위궤양, 이제는 뇌혈관까지. 이노무 학교는 기어이 내 건강까지 축내고 마는구나. 15시간 이상의 공복 상태에 신경과 협진 의뢰서까지 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같았고 수면내시경을 하느라 하필 차도 가져오지 않아 지하철역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곧이어 간 신경과에서 진짜 말 그대로 각종 검사를 했다. 검사가 너무 많아 당일 입원도 해야 했다. 먹은 것은 없지, 마음은 심란하지, 말 그대로 완전히 진이 빠진 상태가 되어서야 반가운 얘기를 들었다.

"혈관 조영술에서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mra보다 조영술이 더 정확해요. 괜찮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3개월 후에 추적관찰을 합시다." 그 후 개인적으로 아는 영상의학과 선생님께도 cd를 보여드렸지만 괜찮은 것 같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 후 퇴근한 남편과 재회할 때는 진짜 죽었다 살아 돌아온 기분이었다. 서로 맘고생 많았다며, 올해 휴직한 것도 정말 잘 했다며 토닥였다. 그때는 몰랐다. 이렇게 해프닝으로 끝날뻔 했던 건강검진이 오래지 않아 나의 생각과 태도를 크게 바꿔놓는 계기가 될 줄은.


뇌에 스턴트를 박아야 될줄 알았던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일단 기뻤지만 조금 찝찝했다. 이제까지 살던대로 그냥 살아도 되나?하다 문득 필라테스가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그룹 필라테스를 거의 매일 가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다리를 머리 뒤로 넘기는 등 요가를 접목한 동작을 많이 쓰셨다. 이런 동작은 혹시 머리에 자극이 갈 수 있으니 멈춰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룹 수업을 내 입맛대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만두자니 특가 장기권을 끊어놓은지라 엄청나게 많이 티켓이 남은 상황. 잠깐 고민하다 티켓을 개인레슨으로 바꿀 수 있는지 센터 원장님께 문의를 드렸다. 원장님께서는 흔쾌히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렇게 40회 넘게 남았던 그룹레슨이 겨우 5회의 개인레슨 티켓으로 바뀌었지만 지금 가성비가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그렇게 나는 한 2주를 쉰 후 개인레슨 룸에서 원장님으로부터 나만을 위한 수업을 받게 되었다.


개인 레슨은 정말 신기했다. 누워서 호흡만 하고 뭐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워치에 찍힌 칼로리 소모는 그룹레슨을 능가했고 2년 넘게 필라테스를 하면서 생전 아픈 적 없던 겨드랑이 아래에 근육통이 느껴졌다. 팔운동을 하면 늘 승모근만 아팠는데 말이다. 또 필라테스의 기본인 호흡을 내가 잘못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호흡할때 가슴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아 보상으로 골반이 과하게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발견하며 신세계가 열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욕심을 내어 개인레슨 16회를 추가로 끊었다. 평소 내가 쓰는 금액에 비해 컸지만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이건 그 값어치를 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잘못된 내 체형과 호흡을 바르게 돌려놓는 연습을 주 2회씩 하고 있는데 주 4회 그룹레슨을 받을 때보다 훨씬 운동 효과가 크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만족도가 크다니, 스스로도 놀란다.


사실, 필라테스를 2년 넘게 다니는 동안 개인레슨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었다. 이런 건 몸이 아파 어쩔 수 없이 그룹 레슨을 못 받는 사람이나 나보다 훨씬 소득이 높은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나는 가성비가 중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회당 가격이 낮아지는 그룹레슨 장기 특가권이 가장 이익이라고, 나는 운동에 딱 그 정도의 예산만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번 건강검진의 충격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평생 개인레슨은 경험해 보지 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룹레슨에서 잘못된 호흡과 올바른 몸의 정렬을 모른 채로 2년을 채우기 전에 개인레슨을 했더라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진하게 남으며 가슬거리는 오래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백화점에 갈 때마다 늘 행사매대에서만 옷을 골랐다. 엄마에겐 할인률이 중요했고 할인률이 클수록 엄마는 큰 만족감을 느끼셨기에. 나중에 사춘기가 되어 본 매장에 걸린 옷이 마음에 들었을 때가 있었다. 그때 거기 가자고 졸랐나 뭐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가

"우리는 아주 멋쟁이가 아니라서 이렇게 저렴하게 할인하는거 사도 괜찮아." 라고 하신 대답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내거나 더 떼를 부리진 않았다. 셋이나 되는 우리 옷을 사려면 내가 욕심을 내선 안 되니까. 나중에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스스로 옷을 사게 되었을 때에도 나는 엄마처럼 당연하게 할인률이 높은 것을 최우선으로 골랐다. 아울렛도 그냥 아울렛이 아니고 팩토리 아울렛을 사랑했다. 그리고 생활 전반에서 내 소비의 한계를 정해놓았다. '더 이상 욕심내면 안 돼. 그건 과소비야.' 물론 총 소비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소비를 '적당한 것'으로만, '가성비'로만 접근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성실하게 2년 넘게 필라테스를 하면서도 호흡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던 나처럼 내가 더 발전하고 만족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와서 백화점 매대를 전전했던 그 시절의 엄마가 원망스럽진 않다. 엄마도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키우셨다는 것을 아니까. 그리고 부족함 없이 키우려고 노력하신 것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엄마의 양육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있다면 나 스스로 고치면 되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나를 키우고 돌볼 차례 아닌가. 다 자란 나는 매대에만 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멋쟁이가 아니니 싸고 괜찮은 것에 만족하는 것을 그만 두고 더 욕심을 내고 싶다. 사치를 부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더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건강한 욕심을 내겠다는 것이다.


또 내가 잘 키워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있지, 내 아이에게도 적당한 것에서 만족하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하려 한다. 돈 말고 당장 시간을 쓰는 태도에서도 '적당히'를 배제하고 '잘'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어정쩡하게 집중도 못하는 상태에서 숙제인 영어책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보다 배트와 볼을 챙겨 밖에서 한바탕 뛰고 온 다음에 개운한 마음으로 책에 첨벙 뛰어드는 질 좋은 시간을 쓰는 아이로 자라길 바란다. 아이는 가성비로 키울 수 없으니까, 또 나는 가성비 엄마가 아니니까. 가성비 엄마보다 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나의 욕구를 응원한다. 나는 적당한 엄마 말고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고, 싸고 괜찮은 삶 말고 더 나은 삶을 살아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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