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게임이 중요합니다.
지이잉, 아이 학교에서 온라인 가정통신문이 왔다. 5월1일 근로자의 날에 학교 조리종사원분들이 휴무를 하기로 하여 급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대신 카스테라, 떡, 쥬스 등 대체식이 제공된다고 하며 알러지가 있거나 양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학생은 개인 도시락을 지참하라는 내용이었다. 흠, 익히 아는 상황이다. 근로자의 날이나 급식실 노동자들의 파업 등이 있을때 학교는 대체식을 제공하는데 대개는 빵과 떡, 쥬스 같은 것들이며 급식실 대신 교실에서 급식이 이루어지니 아이들에겐 특별한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나는 가정통신문을 보고 도시락을 싸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우리 아이는 특별한 식품 알러지도 없고 나는 대체식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나 역시 담임으로서 비급식일을 몇 번 겪어 보았는데 고학년과 저학년의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고학년이야 뭐, 현장 체험학습때에도 엄마표 도시락을 꺼내는 것을 가오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을 검은 봉지에 달랑달랑 들고 오는 멋을 부리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니, 비급식일에 개인 도시락을 지참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저학년은 이야기가 다르다. 2학년을 맡았을 때에는 반 이상의 학생들이 보호자의 정성이 가득 담긴 도시락을 싸 오는 바람에 도시락을 싸 오지 않고 대체식만 받아가는 아이들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나도 괜히 카스테라를 먹는 아이들을 의식하여 "이거 먹으면 충분하지! 부족하면 저녁에 부모님께 맛있는거 해달라고 하면 되지. 그치?"라며 짐짓 그 아이들을 위로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 머리에 있는 나는, 괜히 다른 학부모들보다 더욱 고민했다. 다들 싸오는데 우리 애만 빵을 먹는 것도 초라할 일이며 또 다들 안 싸오는데 혼자만 도시락을 싸 와, 냄새 풍기며 김밥을 먹는 아이의 마음도 불편할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분위기를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 후에 결정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일단 나는 아이에게 5월 1일 비급식일에 대해 설명하며 짝꿍에게 도시락을 싸올 건지 물어보라는 미션을 내렸다. 아이는 짝꿍도 모르겠다고 했다더니 한 이틀 전부터는 싸올 계획이라는 얘기를 전했다. 하지만 전체 30명 중 1명은 참고하기에 너무 케이스가 적으므로 나도 움직여야 했다. 근로자의 날 하루 전, 아이 하교를 기다리며 서로 데면데면한 교문 앞에서 나는 다른 학부모님들께 용기를 내어 인사하고 누구에겐지 모르게 물었다.
"아참, 내일 다들 도시락 싸세요?"
나의 용감한 물음에 뒤를 돌아보는 어머님도 계셨다. 아마 다들 궁금하실 테다.
"아니요. 작년에 큰애 도시락 싸줬는데 혼자만 싸왔다더라고요. 창피해서 다 남겨 왔어요."
"저희 애도 작년에 대체식 먹었는데 꽤 잘나와요. 전혀 쌀 생각 없었어요."
그렇지, 이런 정보가 필요했다. 좋은 경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들 안싸시는거죠? 저희 안싸기로 해요!" 하며 만장일치로 홀가분하게 마무리했는데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는 다음날 그들을 배신하고 말았다. 바로 도시락을 먹을 당사자, 나의 아들 때문이다.
"내일 도시락 다들 안 싼대. 너네학교는 안싸는 분위기인가봐. 내일 그냥 카스테라 먹자."
-"아, 싫어요. 제 짝꿍도 싸온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끝나고 저 운동도 가잖아요. 싸 주세요. 김밥먹고 싶어요."
결과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며칠 전부터 도시락에 대해 투머치 토크를 한 나의 입이 방정이었던 것이다. 아이의 상상 속에 이미 예쁜 김밥이 가지런히 놓인 도시락이 단단히 자리해버린 것을 어쩌랴. 걔를 밀어낼 방도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다음날 우리집 도시락 담당인 남편이 알람을 맞추어 일찍 일어나 김밥을 쌌다. 요즘 격무에 시달린다는데 김밥까지 싸는 모습이 짠해 보였다. (짠해 보이는 걸 보니 이미 나는 찐한 전우애를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등굣길에 남편이 싼 도시락을 들고 발걸음 가볍게 집을 나서는 아이를 얄밉게 바라보며 나는 어제 얘기를 나눈 어머님들께 미안함과 가벼운 죄책감을 느꼈고 오늘 제발 도시락을 싸온 애들이 적지 않아서 아이가 맘 편히 먹었으면 좋겠다는 모성애 비슷한 감정도 느꼈다.
하교한 아이에게 가장 먼저, "도시락 잘 먹었어? 몇 명이나 싸왔어?"라고 물었다. 아이는,
"한 열 명정도 싸왔어요. "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이건 마치 최상의 시나리오처럼 아주 아름다웠던 것이다. 아이의 셈이 맞다면 열 명은 도시락을 싸오고 스무 명은 카스테라를 먹었다는 건데 이러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비율이라(안 싸오는 아이들이 많은 것이 더 이상적이다) 도시락을 먹는 쪽이 뻘쭘하지도, 카스테라를 먹는 쪽이 초라하다고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근로자의 날 도시락 싸기 미션이 끝났다. 아는 것이 독이라더니 이 말이 딱이었다. 괜히 교사로서의 경험에 대입하여 간단한 문제를 너무 어렵게 결정했던 것이다. 앞으로도 학교의 크고 작은 행사에 나의 무수한 경험이 어지럽게 개입하겠지. 그러면서 교사와 학부모라는 두 정체성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휘청이며 점점 똑바로 서게 될 나의 학부모 생활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