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문사회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과 ‘죽음을 생각하는 삶'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의 책『그리스인 조르바』는 삶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산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흔 살에도 아몬드 나무를 심고 있던 할아버지는 “얘야 나는 내가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단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조르바는 “저는요,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면서 삽니다.”라고 답한다. 조르바가 던진 것은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것이다.


하이데거도 죽음을 ‘통해서만’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생이라는 퍼즐의 의미에 대해 수많은 가설과 희망을 세우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바로 그 순간에서야 무한한 가설과 가능성들이 단 하나의 ‘실재’로 변한다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 161~180년 재위)는『명상록』에서 “시간은…급류이다. 무엇이든 눈에 띄자마자 휩쓸려버리고, 다른 것이 떠내려 오면 그것도 곧 휩쓸려서 가기 때문이다.”고 했다. 최고의 권력과 부를 가졌던 그도 삶은 허무했고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전쟁터에서『명상록』을 썼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쓴 글이었다. 그는 ‘소박한’ 삶을 살면서 죽음 앞에 실존적 고뇌를 하는 인간이었다. “조만간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어느 누구도 그것을 피해갈 수는 없다.…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우리 앞에 있었던 과거와 우리 뒤에 올 미래의 거대한 심연을 숙고하라.…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현재를, 이 짧은 순간만을 살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직사광선 아래에서 오랜 세월 동안 빛바랜 석관들 속에 누워 자는 자들은 아무 말이 없다. 죽은 자들은 자신의 유한함 때문에 시간의 무한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람은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죽음의 미망 앞에서 무력하다. 오오 죽은 자들이여, 영원 속에서 안식할지니!” 장석주의 『내가 사랑한 지중해』(2014년)에 나오는 글이다.


나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소멸될 뿐이라는 것을 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불가사의 한 사건이자 끝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우리는 죽음의 신비와 불가해성 앞에서 파스칼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죽음으로써 우리는 시간의 영원함과 공간의 광대함에 삼켜지면서 덧없이 사라진다. 우리의 삶이란 건 넓은 바닷가 모래밭에 찍힌 발자국과 같은 것이다. 파도가 와서 모래밭을 휩쓸고 지나가면 발자국은 사라진다. 그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죽음에 순응하고, 그 바탕에서 삶을 깊이 성찰할 뿐이다.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과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것’ 중 어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죽음을 생각하는 삶”은 삶에서 ‘헛된 일’을 피하게 한다. 언제든 삶이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고, 가장 소중한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이다. 삶을 낭비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따라간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인 것에서 삶은 시작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자기 자녀를 살해하는 유일한 종: 호모 사피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