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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시장으로 폭력에서 사기로

칠레에서 발견된 유골을 보면 기원전 약 8년경 수렵채집 사회에서 폭력과 전쟁은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할 정도로 일상적이었다. 게다가 기원전 1000년경부터는 전쟁과 폭력 행위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문명이 발달해갔음에도 전쟁과 폭력 행위는 감소하지 않은 것이다. 폭력 행위는 외부인과 내부인 사이에서보다 집단 내에서 더 많이 발생했다. 문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https://journals.plos.org/plosone/article?id=10.1371/journal.pone.0290690


산업혁명 이전 인류는 절대빈곤 즉 ‘맬서스 함정’에 빠져 있었기에 인구증가를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산업혁명 시기 토마스 맬서스(1766~1834)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기 때문에 인류는 멸망한다.’라고 주장했다. 농업사회는 결국 ‘맬서스 함정’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인구 증가로 생존의 위기를 겪게 되면 주변의 농업사회나 수렵·채집 사회의 자원(토지와 식량)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데 이는 결코 무리한 상상이 아니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최초로 잉여식량과 함께 빼앗거나 지킬 가치가 있는 부를 산출해냈기 때문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 폭력이나 ‘작은’ 전쟁은 구석기시대에도 흔한 일이었지만 농업으로 경제적 잉여가 발생하기 시작한 신석기시대 후기부터는 폭력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인류가 신석기시대를 지나 농업사회로 전환되면서 고된 노동이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간의 ‘새로운’ 폭력도 증가하였다. 상대적으로 텅 빈 땅에 띄엄띄엄 살았던 수렵채취인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공격자로부터 도망쳐 다른 곳에서 사냥하고 채집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날로 인구가 늘고 붐비는 대지에 갇혀 사는 농경민은 살던 자리를 마음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웃과 전쟁을 벌여 승리한 측이 패배한 측을 몰아내지 않고 커진 사회 안으로 흡수 통합하는 일이 많았다. 통합은 흔히 강간과 약탈, 노예화를 수반하는 잔혹한 과정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대형 사회가 생겨났고, 그런 사회의 통치자는 세금을 징수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 외에는 달리 관심이 없었다.


야마기와 주이치가 쓴 『폭력은 어디서 왔나』(2015년 번역출간)는 인간 폭력의 원인의 하나로 토지 소유를 든다. 인간이 수렵 채집을 할 때는 여러 공동체가 넓은 영토를 공유하면서 살았다. 열대우림에 사는 피그미족과 부시먼도 수백 km²에 이르는 활동영역을 갖고 있었다. 각 공동체가 독점할 수 있는 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경이 시작되면서 토지에 울타리를 치고 경작물을 보호하면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고대 농업사회에선 전체 사망자의 10~20%가 인간에 의한 폭력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추정되니 당시 인류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전쟁과 테러의 공포를 느끼지만 고대사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시신을 훼손하는 일도 일어났다. 기원전 약 4000년~기원전 1000년경 유럽에 살았던 사람들은 매장된 사람의 유골을 다시 파내 사용했다. 사망 직후 유골로부터 골수 등을 추출하려고 시도했고, 뼈 등을 도구로 쓰기 위해 변형시킨 것이  관찰됐다. 인골을 음식이나 도구의 재료로 활용하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소유를 둘러싼 전쟁과 폭력은 시장과 자본주의가 되었다.  전쟁은 시장으로 폭력은 사기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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