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삶의 의미가 존재하는데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겨지거나 혹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소위 ‘현자(賢者)’를 찾아 방황한다. 어떤 사람은 종교나 철학이 삶의 의미를 가르쳐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사람들은 특정 종교에 귀의하거나 철학 서적을 탐독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체화시킨 삶의 의미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삶의 의미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그것이 각자의 삶에 큰 의미를 지니려면 각자가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내가 누군지는 내가 결정한다(I decide who I am).” 영화 「보헤미안랩소디」의 언어이다. 삶의 의미는 내가 스스로 찾는다는 뜻일까.
삶의 의미를 찾는 것(meaning seeking)은 이미 존재하지만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그 무엇을 찾는 것(meaning finding)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드는 것(meaning making)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우리가 삶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나는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반지에게 “너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오히려 반지가 우리에게 “나는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산 반지는 그냥 물건이다. 하지만 그 반지를 나누어 낀 연인에게는 반지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산도르 마라이(Sándor Márai)의『열정』에 나오는 언어이다.…주인공 헨릭은 아내와 친구가 부정을 저지른 것을 알았다. 그러나 헨릭은 그 즉시 대응하지 않는다. 못 견딘 아내는 자살하고 친구는 도주한다. 헨릭은 41년을 은둔자처럼 산다. 인생을 다 살아 노년이 된 어느 날 그 둘은 마침내 마주 앉고, 헨릭은 일생 동안 품었던 말들을 폭포수처럼 하룻밤에 쏟아낸다. “다 지나간 지금, 자네는 사실 삶으로 대답했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그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너는 어디에서 신의를 지켰고, 어디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냐? 너는 어디에서 용감했고, 어디에서 비겁했느냐? 세상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나 대답을 한다네. 솔직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국 전 생애로 대답한다는 것일세.”…인간은 자신이 누군지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살아낸 삶, 인생 그 자체일 것이다. 말은 때때로 위대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삶 앞에서 말은 무력하고 왜소하다. 진실은 말이 아니라 삶에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 내가 어떤 인간인지, 누군지 하는 질문엔 말로 답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살아 낸 흔적으로 말할 뿐(내가 만난 名문장, 동아일보, 2017.7.29. 최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