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유명한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1962)의『데미안』에 나오는 글이다. 내가 살았던 산골짜기에는 책도 서점도 도서관도 없었다. 내가 살았던 산골은 ‘알 속’이나 다름없었다. 5학년 때 서울로 왔지만 여전히 ‘알 속’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이 내겐 알을 깨고 세상을 파괴하는 출구가 되었다.
고 박완서처럼 40대에 작가를 처음으로 꿈꾸었지만 정신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어린 시절 막연한 꿈을 그리던 소년은 오십이 넘어서야 이루지 못할 꿈과 타협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주었다.”라는 고 박완서 작가의 말처럼 글을 쓰면서 마음이 평온해지고 행복했다. 16세기 철학자 미 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는 가까운 친구가 죽고 이어서 아버지와 동생, 딸이 죽는 비극을 겪었다. 법관직을 그만 두고 20년 글을 써서『에세』를 출간했다. 삶에 대해서는 “나는 하루를 산다.”라고, 죽음에 대해서는 “습관처럼 익숙해지자.”라고 말한다. 살아가면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을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이다. 휩쓸려 시장을 떠도는 삶은 잠자리에 누우면 공허함만이 찾아온다. 글쓰기는 또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붙잡는 도구가 되었다.
2014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스티븐 호킹의 삶을 그렸다. 당시 8점도 안 되는 낮은 평점을 받았지만 내겐 감명적인 영화였다. 촉망받는 물리학도였던 스티븐 호킹은 한 여인과 첫 만남에서 사랑에 빠져든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 앞에 시한부 인생이라는 비극이 닥친다. 결국 스티븐 호킹은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과학자로서의 꿈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런 일이 정말로 닥친다면 과연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장애인이란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생각할 때에만 장애인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장애인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애를 원망하게 되면 가장 중요한 마음의 장애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음의 장애인이야말로 진짜 장애인이다.”라고 말했다. 영화에는 잊지 못할 명대사가 나온다. “인간에게는 한계란 없다. 삶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There should be no boundary to human endeavor. However bad life may seem, where there is life, there is hope).” 스티븐 호킹은 21세에 루게릭병으로 5년의 시한부 삶의 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서 ‘과학’을 택했다.
“글 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눈먼 말이었네…무엇으로도 고삐를 풀 수 없었네.…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 기둥 하나 붙잡고 여까지 왔네.” 박경리의 시『눈먼 말』에 나오는 구절이다.
눈먼 말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했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잡고
여까지 왔네
박경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