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성유전 트라우마의 범죄자들
과거 성격이나 체질은 유전적으로 결정돼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DNA가 생명체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가설에 오류가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현대의 유전학자들은 이를 ‘후성유전학’으로 설명한다. 후성유전(epigenetics)은 발생과정이 끝난 DNA 염기서열은 변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전자 발현과 기능 등 유전자 작동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를 말한다. 쉽게 말해 유전자가 같음에도 유전자가 다르게 발현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후성유전학은 아직 연구의 시작 단계이다. 아직은 논란이 많다.
2010년「타임지」는 커버스토리로 ‘왜 당신의 DNA는 당신의 운명이 아닌가?(Why Your DNA Isn't Your Destiny?)’라는 제목의 글이 나왔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을 다룬 이 글은 환경이나 인간의 행동이 세포 안의 유전정보에 영향을 주고 더 나아가 자손의 유전정보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주장이 소개되었다. 인간의 뇌는 쓰는 만큼 좋아지고 치매를 예방하려면 책을 읽고 쓰고 운동을 하는 것이 권장된다. 그런데 자신이 머리를 많이 써서 뇌가 좋아지면 자식에게까지 대물림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동물실험에 의하면 자식에게까지 대물림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재미있는 것은 유전자의 변화 없이 획득한 형질이 자식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후성유전’이다. 임신 중인 맡은 냄새를 태어난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그것이다.
유전자는 단기적인 경험으로는 변하지 않지만 후성유전학(epigenetics)적인 변화는 나타난다. 스트레스나 특정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유전자에 작은 화학적 표지(chemical flags)가 추가될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전쟁과 내전 같은 폭력을 겪거나 경험한 사람과 그 후손은 유전자에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발생한다.
9·11 테러가 발생했던 2001년 9월 11일에 쌍둥이 빌딩 근처에 있었던 임산부들의 타액 샘플을 검사했다. 코티솔 수치가 상당히 낮았고, 나중에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9·11 당시 임신 후기였던 아기들의 경우 코티솔 수치는 더욱 낮았다.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 다시 이들을 검사했다. 그 결과 이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 경향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시리아에서는 학살과 내전이 오래 이어졌다. 1980년대의 종파적 학살과 2010년대의 내전이 그것이다. 전자는 1982년 시리아 아사드 정권이 하마시를 포위하고 수만 명을 살해한 것이었고, 이후 아사드 정권에 맞선 내전이 일어났다. 시리아 사태에서도 후성유전학적인 고통이 나타났다. 시리아 난민 가족의 트라우마가 3대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 외상성 폭력 트라우마를 정부군 또는 민병대에 의해 직접 물리적 폭행을 당하거나 타인이 폭력을 당하거나 살해당하는 모습, 부상자나 사망자를 목격한 경우로 정의했다. 학살 당시 생존자의 손주에게는 조부모가 경험한 폭력 트라우마로 생긴 게놈에 14개의 변형이 발생했다. 직접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의 게놈에서도 후성유전학적 변화 부위 21개가 발견됐다. 1980년대와 2011년 이후 폭력에 직접 노출된 사람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21개 DNA 영역에 독특한 후성유전학적 표지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자궁에 있을 때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노화 질병과 관련이 있는 후성유전학적 노화 가속 현상을 보였다.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지구 초토화 학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진행 중일 것이다.
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25-00937-z
물론 트라우마가 다음 세대에 전달될 수 있는지는 논란 중이다. 후성유전학적 트라우마 같은 경험이 유전되기는 어렵다. 트라우마가 양육에 반영되면서 유전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몇 세대 만에 유전자가 확 변하지는 않는다. 자그마한 변이가 쌓여 점차적으로 바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그것이 세대를 거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 폭력의 뒤, 그 배후에서 조정 하고 지원하는 사람들은 학살 범죄자이다. 그들에 대한 법적 제도적 ‘조치’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고민해야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