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잊지못할 사랑과 쇼윈도부부의 사랑


그해 여름


분홍 빛 내리닫이 입고

딸에게 친구들에게

손 흔들며 작별하고

수술실에 들어갔었던 그 해 여름

눈을 떴을 때

하루사이

세계지도 같이 기미가 쓴

딸의 얼굴이 보였다


글 쓰는 굴레 벗어버리고

고뇌와 분노의 굴레 벗어버리고

미움과 절망도 다 벗어버리고

그해 여름은 불행하지 않았다.


박경리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은 인간의 삶에서 ‘극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문학작품 속에, 영화와 연극에서 표현되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의 원천이었고 그것 없이는 인간의 삶은 거칠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뇌 과학으로 설명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진화의 산물이고, 종교적으로 피조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진실은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일부일처제와 가정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많지는 않지만 다양한 동물이 일부일처제를 이루고 살아간다. 특히 가족프레리들쥐는 죽을 때까지 한 쌍이 같이 살며 ‘가정’을 이룬다. 심지어는 다른 들쥐의 새끼도 잘 돌보며 살아갈 정도로 인간과 유사하다. ‘쥐’도 입양을 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모습이 인간과 유사한 몇 안 되는 포유류이다. 프레리들쥐의 뇌에서 나오는 옥시토신 호르몬은 다른 쥐보다 훨씬 많다. 이것이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프레리들쥐의 옥시토신을 차단하면 그런 모습이 사라진다. 옥시토신이 부족한 생쥐 엄마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 않아 굶어 죽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프레리들쥐를 대상으로 연구를 많이 한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사랑 호르몬’이 떨어지면 그들의 사랑도 식는다. 그래서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이라는 말도 나왔다. 인간은 젊은 시절 잊지 못할 뜨거운 사랑을 하며 잘 되면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기간이 길어지면서 쇼윈도(show window) 부부가 된다. 그래도 헤어지지 않고 아이들과 가정을 화목하게 꾸려간다. 때로는 ‘잊지 못할’ 사랑이 그리워 바람을 피기도 한다. 사랑 호르몬은 ‘불행하게도’ ‘다른’ 여자에게는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면서 새끼를 키우는 프레리들쥐(Prairie vole)도 인간과 마찬가지이다. 유전자를 조작하여 더 이상 사랑(성욕)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도 프레리들쥐들은 여전히 ‘애착’을 가지고 살았다. 사회적 애착 관계에 작용하는 또 다른 호르몬인 바소프레신이 더 많이 분비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https://doi.org/10.1016/j.neuron.2022.12.011


사랑과 부부생활은 호르몬 작용 이상의 무언가가 작용하는 것이다. 생명의 생존과 번식에 애착은 매우 중요하며 단 하나의 호르몬으로만 그것이 생긴다면 그 종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호르몬이 떨어지면 새끼와 배우자를 버리고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종이 살아남았다면 뭔가 새로운 기제가 작동하였을 것이다.


여자가 출산을 하면 뇌 구조가 변한다. 아기를 낳은 여성의 뇌에서 특정 영역의 대뇌피질이 줄어들고 아기와의 유대감이 높아진다. 아기와의 유대감이 높게 나온 여성일수록 이러한 뇌 구조 변화가 더 많이 일어났다. 특히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특정 전두엽 영역이 변하기 시작했다. 뇌의 이런 변화는 2년 가까이 유지된다. 또 다른 사람의 아기 사진보다 자신이 낳은 아기 사진을 볼 때 뇌 공감 영역이 훨씬 강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남자의 경우 아버지가 되기 전과 아버지가 되고 나서의 이 부분의 차이가 없다. 아버지의 비극이다. 늙어서도 아버지는 ‘어려운’ 존재로 남는 생물학적 배경일 것 같다. 하지만 남자도 아기가 생기면 변한다.


부모는 모두 아이가 생기면 뇌 피질에 변화를 보인다. 남자도 아이가 생기면 뇌가 바뀐다. 아빠가 된 남성들의 뇌는 아빠가 되기 전의 뇌와 뚜렷이 달랐다. 주의력, 계획, 실행 등 기능과 관련된 피질 영역과 공감력, 시각 처리와 관련된 네트워크 영역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회백질 피질의 부피가 다소 감소한다. 이런 변화는 새로운 경험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시냅스 연결을 만드는 뇌의 능력(신경 가소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호르몬 변화에 따른 사랑은 문어에게도 강하게 나타난다. 바다 속에 사는 머리 좋은 문어는 특히 별나다. 문어는 알을 낳으면 먹지도 않을 정도로 헌신한다. 알에서 새끼들이 나오고 첫 번식을 끝내면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으로 1년의 수명을 마친다. 마치 ‘삶의 의욕’을 상실한 듯 죽어간다. 1977년 문어의 이런 행동이 눈샘(optical gland)과 관련돼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문어의 눈샘을 없앴더니 새끼 보호 행동이 없어진 것이다. 2018년에는 문어가 음식을 안 먹고 죽어가는 행동을 할 때 콜레스테롤 대사와 스테로이드 생산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활성화하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스테로이드 호르몬 분비의 극적인 변화 때문이다. 어미 문어의 눈샘에서 콜레스테롤 전구물질이 나왔다. 사람도 이런 물질이 많아지면 심각한 발달행동장애를 일으킨다. 문어는 자신의 종을 먹어버리는 성향이 강해 태어난 새끼를 먹어버리는 일을 막기 위해 그렇게 진화했을 수 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인문학적 용어인 ‘사랑’은 모호한 단어가 되고 있다. 또한 세상이 물질중심의 생물학적 모습을 띠면서 과거의 사랑 개념은 고어가 되어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 소수자에 대한 짧은 지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