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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자의 조각보 Mar 25. 2022

나는, 미운 오리 새끼였을까?

나도 꽃처럼 예쁘고 싶었다.

  



1961년 가을에, 나는 아버지 고향인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군인이었던 아버지 부대가 있는 강원도 평창 마지리에서 살았다. 내가 태어날 때가 되자 엄마는 출산을 위해 시가인 충남 공주로 오빠를 데리고 와 있었다. 서리가 내리기 전이었고 가을걷이가 마무리되지 않아 시골은 바빴다. 마당에는 말리려고 베어 널어놓은 콩이 가득했다고 한다. 엄마는  지난날을 회상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그때가 가을이었어, 내가 경자 쟤를 낳구 몸조리한다구 누워있는디, 일꾼들이 마당에서 터는 콩이 방문에 '탁 탁' 소리를 내며 튀어 오더라구..  시골이니께 가을걷이하느라 얼마나 바뻣것어~ 그러니 애를 낳고 누워있어도 맘이 편했것남?...”  

  

밉다니까 태어나는 것도 하필 바쁜 가을이었다고 했다. ‘모태신앙’이니 ‘모태솔로’니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모태 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지독한 미움을 받고 자랐다. 생긴 것과 하는 짓이 모두 맘에 안 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마음 아프다. 

    

트집 잡히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고, 엄마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나 때문에 잔소리가 시작되지 않도록 얼마나 노력했는지 기억 속에 또렷하다. 세상에 태어난 것과 생긴 모습은 내 선택이  아니지 않은가? 





    

 '키만 멀대같이 큰'데다  ‘모가지는 황새 늦새끼’처럼 가늘고, 손 발 움직임은 ‘죽은 게 발’ 놀리는 것 같고, 허리는 ‘쉰 닷 발이나 되게’ 길다고 했다. 피부는 ‘된장독에서 금방 꺼낸 무장아찌’처럼 새까맣고, 고모를 닮아서 톡 튀어나온 이마는 ‘누가 망치로 친 것’ 같고, 걸음걸이는 ‘가랑이에 밤송이를 끼고 걷는 듯’ 어기적거린다고 흉을 봤다. 꼴에 눈썰미도 있고 손재주는 있는 것 같지만 ‘한 여름에도 뱀처럼 차가운 손과 발이’  너무나 정이 떨어진다고 했다. 하다못해 발조차도 ‘발가락 사이가 오리발’처럼 넓어서 생전 무좀으로 고생은 안 하겠다며 비아냥거렸다. ‘생긴 게 그 모양이라’ 뭘 입혀도 옷태가 안 난다는 말도 항상 들었다. 


    

자신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이 못생겼다며 어디라도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것에 걸림돌이 되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절대 가지 않았다. 나를 보면 내 외모를 동정하면서 한 번 더 쳐다볼 것 같은 부끄러움에 오래도록 시달렸다. 



엄마는 내가 어기적거리며 걷는다고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나를 흉내 내며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나는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있는 곳을 지날 때면 엄마의 흉내를 의식했고 그것에 신경 쓰다 보면 자꾸만 더 어색한 걸음이 되었다. 예민한 사춘기를 지나면서 외모에 대한 열등감은 바깥출입을 안 하는 것으로 자신과 타협을 보았다. 

    





학교도 보내지 않아 초등학교도 겨우 다녔다. 이후로는 처마 끝 공간에 벽돌을 쌓아 대충 만든 작은 골방에서 나는 십 대의 대부분을 혼자 보냈다. 방음 안 되는 창호지를 바른 문을 통해 들리는 엄마의 끊임없는 악담과 함께였다.   


"생긴 게 그러면 야물딱지게 살림이라도 잘 하든가! 남들처럼 공장에 라두 다녀서 돈이라두 벌어오든가~" 


오빠도 어쩌다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는 날이면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야! 나오지마!”  

    

동생도 내게 ‘언니’라고 한 번도 살갑게 부르지 않았다. 동화 속 '미운 오리 새끼'처럼 나는 가족들에게 소외당하는 차라리 없으면 편했을 그런 자식이고 형제였다. 항상 그들은 그들의 친구들과 함께 놀았고 어울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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