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믿기에 행복한가, 행복하기에 믿는가
사람과 믿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믿음은 종교인들만의 특별한 장기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믿음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인간 사고가 발달하고, 공동체가 발전한 것 또한 믿음의 공이 컸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인간은 두 가지 방향으로 믿음을 발전시켰다.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고, 나머지는 사람과 세계 사이의 믿음이다.
사람과 사람은 믿음을 밑바탕 삼아 사회를 구성한다. 상대방이 나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원초적인 믿음부터 시작하여, 함께 작업을 수행할 만한 사람인지, 공동체에 편입시킬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거래를 나누기에 괜찮은 사람인지, 사랑을 나누어도 될만한 사람인지, 가정을 이루어도 될만한 사람인지, 즉 믿음을 주어도 될 사람인지 판단한다. 이 판단은 종종 무의식적이기에 단어가 주는 감각이 낯설 수도 있지만, 이는 명백한 진실이다.
우리가 가진 눈동자의 흰자가 그 증거다. 많은 동물들이 눈을 가득 채운 다양한 색의 각막을 갖는 반면에, 인간은 흰색의 공막을 서로에게 보인다. 이를 통해 나의 시선을 타인과 나눈다. 눈을 통해 의도와 의사를 전달하고 그것은 무리 사이에 공유된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폭발적인 정보의 교환이 일어난다. 추측하기로는 먼 과거에는 언어보다 강력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의 눈짓을 비롯한 표정 또한 그 힘을 물려받았다.
흰자위로 대표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 외에, 나머지 하나는 사람과 세계 사이의 믿음이다. 내가 배우기로는 이 믿음이 사람을 지구의 어떤 종보다 똑똑해지게끔 만들었다. 자연법칙에 대한 추측뿐만 아니라, 가공의 개념을 만들어 서로 나누었다. 언어가 그렇고, 개념적으로 표현된 신이 그러하며, 화폐가 그렇고, 국가가 그렇고, 주식회사가 그렇고, 브랜드가 그렇다. 세계에 대한 해석과 믿음이 없었다면 인류 사회를 견인한 농업, 종교, 기술, 금융 등의 발명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를 종종 아프게 한다. 사람 사이의 믿음은 종종 우리를 배신했으며, 세계에 대한 믿음은 때때로 우리의 무지의 괴로움 앞에 무릎 꿇린다.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신뢰 혹은 질서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 사람은 좀처럼 전과 같은 믿음을 갖기 어렵다. 혹자는 이를 어린 시절의 순수를 상실하는 과정이라고 지적한다. 보고 듣는 것을 오롯이 믿었던 아이가 성장하며 사람과 삶의 그림자 속에서 혼돈을 배운다. 그 혼돈이 자신의 존재마저 뒤흔드는 경우에 이를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와 나의 삶, 그리고 삶의 다음 모습에 대한 믿음을 잃고 곧 의미를 잃는 것이다.
믿음의 습득은 무의식적이지만, 그 상실과 회복은 충격의 깊이만큼 우리 마음에 각인된다. 회복의 과정을 관찰하다 보면 내 마음 상태가 좋아서 사람과 세상에 대한 믿음이 다시금 커진 것만 같다. 마음이 나아져서 다른 남자 혹은 여자를 혹은 사람을, 아니 세상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느껴진다. 밖으로 향하는 신뢰는 우리의 관계와 생활에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는 기분을 나아지게 해주는 여러 자극제에 탐닉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금 간 뼈가 붙기까지 진통제로 억누르듯, 금 간 나의 믿음을 여러 자극으로 덮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이다. 믿음이 우리 삶을 견인하듯이, 그 믿음이 우리의 행복을 지탱한다. 기분 전환으로 얻은 믿음은 일시적이다. 부실한 뼈대는 쉽게 무너진다. 그보다는 우리가 세운 가설이 무너졌을 때, 이를 다시 믿음부터 세우는 법을 익혀야 한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무한하기에, 무너진 것을 세울 때 재료가 모자라는 일은 없다. 그저 결심하는 것이다. 사람과 세상에 대해 야심 차게 세운 가설이 무너지면 잠시 속상할 수는 있겠지만, 기쁜 마음으로 더 튼튼한 이론을 내세우면 되는 것이다. 삶을 실험하는 과학자인 우리는 상처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믿음이 행복을 지탱하는지 어떻게 아냐고? 아기와 강아지의 미소를 보면 누구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