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다정함을 믿지 마오.

어린 소녀의 고백

by ClaireH


돌이켜보면, 그 사람은 나를 아꼈던 것 같다.
아꼈지만, 함께할 준비는 안 되어 있었던 사람.
그리고 나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어느 날,

남자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제 나 돌아가야 할 날이 얼마 안 남았어.

알고 있지?”

“뭐? 벌써? 언제?”

“한… 3개월 정도? 농장 가서 세컨드 워킹비자받기도 싫고, 그냥 돌아가려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비자 해결해 줄게.

… 나랑 같이 살자.”


무슨 말이지?

순간, 머리를 뭔가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같이 살자고? 지금… 그걸 말하는 건가?


“… 그게 무슨 뜻이야?”

“동거 비자로 영주권 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고 들었어.

그걸로 해결하면 될 거 같아.”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말했다.


“일단, 양쪽 부모님께 말씀드려 보자.

우리가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왜 그 순간에 부모님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다.

그만큼 큰 선택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엄마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조차 아직 모르겠으니까.




며칠 뒤, 그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부모님께 말씀드렸어.

그런데 우리 부모님이 너에게 서약서를 받고 싶다고 하셔.”


“…무슨 서약서?”

“그 어떤 명목으로도 내 재산을 원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써줬으면 좋겠대.”


나는 내가 잘못 이해한 줄 알았다.

영어가 짧아서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든지 써줄 수 있어.”


나는 아니라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억울하게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질문은 오직 하나였으니까.

쓸 수 있냐, 없냐.”


나는 내 당당함으로 말하고 싶었다.

얼마든지 써줄 수 있다”라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남자친구의 부모님은 한국 드라마에서 본

좋지 않은 여자 캐릭터들’ 때문에

혹시라도 그런 사람일까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그들의 노파심이었다고.


심지어…

그 서약서를 실제로 받을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다만, 내가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좋아해야 하는 걸까?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의 시험을 통과했고,

결국 모든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애는 네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믿음직스럽지 않니?”

“먼저 손을 내민 것도 그 애였고,

봐온 걸로는 나쁜 아이는 아닌 것 같아.”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난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스트레스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너 요즘에 신경 쓰는 거 때문이야?

생리는 하고 있어?”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생각을 못 했다.


혹시… 설마…




다음 날, 떨리는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약국에 갔다.

테스트기를 들고 기도하듯 확인했다.

제발 아니길. 제발.


결과는,

두 줄.

선명한 두 줄이었다.


그 순간,

눈물이 뚝뚝 흘렀다.


친구는 놀람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어떡해… 진짜야?”


나는 무서웠다.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그에게 전화했다.


친구는 옆에서 말했다.

“스피커폰으로 해봐. 반응이 궁금해.”


“…여보세요? 나야, 할 말이 있어서 …

나… 임신한 것 같아.”


“… 뭐?.. 뭐라고?”

“임신… 한 것 같다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난 아직 아기를 갖고 싶지 않아.”



그 한마디는

그동안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을

산산이 무너뜨렸다.


그의 다정함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내민 그 손은

처음부터 잘못 껴진 단추처럼

모든 걸 어긋나게 할 줄은 몰랐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고,

해결해야 할 것들만 남아 있는 이 시점에서

나는 더 이상,

무엇이 좋은 선택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 뱃속엔,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

그건…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 알겠어.

이미 일은 일어났어.

우리 둘이서 결정할 문제가 아닌 거 같아,

우리 부모님께도 말할 테니, 너도 너희 부모님께 말씀드려.”


그렇게 전화를 끊고 , 난 결심했다.


이 생명은,

기필코 , 지키겠다고.


이제 20살을 갓 넘긴
나의 미래조차 모른 채 겁이 났지만,

너 하나 지켜야겠다는 그 마음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단다.

사랑한다,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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