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믿음
그때 나는 그렇게 믿었다.
조용한 다정함, 따뜻한 말투, 배려하는 눈빛.
그 모든 게 사랑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허망한 소설 속에 살았던 거 같다.
그는 2남 2녀 중 막내였다.
미얀마에서 태어났지만,
중국인의 피를 이어받았고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키는 172cm 정도, 마른 체형에 청바지에 흰티.
중국어, 영어, 미얀마어까지
세 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그에게선
늘 똑똑하고 침착한 분위기가 흘렀다.
호주 시티에 본인 명의의 집도 있었고,
IT 기업에 다니며 좋은 월급도 받는
말 그대로 ‘조건 좋은 남자’였다.
얼굴은 잘생긴 편은 아니었고,
내 스타일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과는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하는 사교성과
무엇보다 배려 깊은 다정함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조금은 엉뚱한 부탁을 해왔다.
“인사 한 번만 해줄 수 있어?”
“응? 누구한테?”
“… 우리 부모님. 오늘 하루 종일 게임만 했다고 여자친구 없냐고 뭐라 하셔서
사진 보여줬는데… 안 믿으셔. 가짜라고 하셔서…
내가 큰소리쳤어. 진짜 있다고.
딱 한 번만, 인사만 해줘. 부탁이야.”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오히려 귀엽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그의 ‘가짜 아닌 여자친구’가 되어
그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가게 되었다.
사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참 긴장됐지만,
생각보다 그의 가족들은 너무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그 순간,
나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환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의 다정함은 연애 내내 이어졌다.
늘 나를 먼저 생각해 주었고,
나의 감정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 배려는 처음엔 고마움으로,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는…
알 수 없는 거리감으로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혹시 일자리 구해?”
“내가 있던 미용실인데 자리 비었거든. 너 얘기해 놨어. 괜찮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어.”
그렇게 나는 풀타임으로 일하게 되었다.
아침부터 마감까지,
주 6일. 평일 하루 쉬는 강도 높은 스케줄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건 내가 드디어
다시 ‘무언가를 배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처음엔 늘 그렇듯, 샴푸부터 시작했다.
친구가 소개해준 그 미용실은
당시 이스트우드에서 제일 잘 나가던 큰 곳이었다.
주말이면 손님들로 북새통이었고,
디자이너 선생님들은
동시에 두 명씩 손님을 받는 게 기본이었다.
오픈부터 마감까지 쉴 틈 없이 돌아가는 그곳은
말 그대로 초대박 미용실이었다.
그 안에서 나도 이 악물고 배웠다.
첫 사수선생님에게 눈물도 쏙 빼며 하루하루 적응해 나갔다.
그가 내 인생의 반쪽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지만…
(그 이야기는 언젠가 또 풀어보려 한다.)
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연애는 점점 ‘의무적인 만남’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렇게 숨 가쁜 하루들이 이어졌고,
그 사람과의 관계는 어느새
‘사랑’보다는 ‘유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조용히 금이 가던 마음이, 곧 쏟아져 내릴 줄은.
-다음 이야기-
님아, 그 다정함을 믿지 마오.
“ ….. 난 아직 아기를 갖고 싶진 않아”
사랑인 줄 알았던 마음이
한순간 차가운 현실이 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