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중드를 볼 때마다 남자 주인공 앓이를 한다. 원래 금세 사랑에 빠지는 성격이라 그런 건지, 원래 중드란 그런 것인지, 아무튼 중드를 보고 나면 남자 배우들 뒤에 후광이 보여 정신을 못 차린다. <화천골>을 볼 땐 훠젠화(곽건화)를, <구주천공성2>을 볼 땐 쉬정시(서정계)를, <진정령> 볼 땐 샤오잔을 앓으며 곧장 그들의 ‘필모그래피 깨기’에 돌입하곤 했다. 물론 앓다가 이내 다른 대상이 나타나거나 비용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완벽하게 모든 작품을 본 배우는 없다. 시간과 비용 면에서는 소설가에 대한 전작주의가 배우 전작주의 보다는 더 수월하다. 중드 고장극의 경우 기본적으로 50부작이 넘고 어떤 작품은 100부작에 가까워 한 작품을 끝내는 것이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버스에서, 점심 먹으면서, 아이 재우면서 짬짬이 보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날 새서 몰아 보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된다면 나는 언제든 앓을 준비가 되어 있다. 들어오라, 들어오라! 이 마음의 시작이 바로 량차오웨이(양조위)이다.
그는 나의 첫 해외 스타였다. 물론 그 전에도 소머즈나 맥가이버에 빠진 적은 있지만 그 배우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건 그저 그 역할을 좋아한 것일 뿐이다. 이름을 찾아보고 기억한 스타는 량차오웨이(양조위)가 처음이다. 수많은 무협 비디오 테이프 중 언뜻 그를 본 것도 같지만 결정적으로 그에게 반한 건 <의천도룡기>의 장무기 역할이었다. 지금의 감각으로 본다면 엉성한 CG에 웃음이 나겠지만 <의천도룡기 86>은 연기와 연출이 모두 뛰어나 지금도 <의천도룡기> 중 최고작으로 꼽힌다. 중드가 지금의 아름다운 영상미를 갖추기까지 지난했던 시절을 아는 이라면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이 있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손꼽히는 작품으로 만든 것에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최고의 장무기라 불리는 량차오웨이(양조위)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순수하고 정의로운 장무기의 캐릭터를 그보다 잘 표현한 배우가 내 눈엔 아직 없다. 물론 사손 역할도 1986년 버전을 능가할 자가 없지만.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던 시절에 그를 사랑하는 일은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달콤했다. 당시 다른 배우들에 비해서는 국내 인지도가 낮았던 지라 연예 프로그램에 나오는 일도 거의 없어 나는 동네 음반 가게에서 구한 테이프 <一天一點愛戀>의 노래가사가 적힌 종이를 마르고 닳도록 보고 또 봤다. 궁금한 즉시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요즘과 달리 에피소드 하나 얻는 게 너무 귀해서 하나하나 손에 쥔 자료들은 너무나 소중했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르는 그런 자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세계적인 배우가 되어 굳이 내가 따로 그의 프로필을 읊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이제는 내가 그에 대해 ‘더 잘’ 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학창시절엔 내가 그를 가장 많이 아는 아이였는데, 기술의 발달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난 그를 30년간 좋아했다구요!” 양으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었던 모양인지 속속들이 파헤쳐지는 에피소드들은 대체로 미담이다.
량차오웨이(양조위)는 단역일 때부터 연기를 잘한 모양이다. 다른 단역 배우들보다 대사가 많았다고 한다. 초롱초롱한 눈은 때로는 우수의 극치를 달려 깊이가 있다. 노래 테이프 안의 사진들을 접히는 부분이 찢어질까 조심조심하면서 틈만 나면 봤다. 그 눈을 보기 위해서. 사진 속에서 그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는데, 깊게 안으로 진 쌍꺼풀에 우수가 맺힌다. 연기가 뛰어난 배우이기도 하지만 량차오웨이의 눈빛을 능가하는 배우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배우의 눈빛이 좋을 때 량차오웨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어떤 감독은 그를 가리켜 ‘꽃을 달라고 하면 봄을 가져다 주는 배우’라고 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관객도 감독도 반하는 량차오웨이, 그래서인지 한 번 꿰찬 주인공 자리는 지금까지도 그를 놔주지 않는다. 물론 그가 주인공 자리에 연연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는 스타이기 전에 배우니까!
한때 친구들로부터 “누구?”냐는 반문을 들어야 했던 량차오웨이가 지금은 그때의 다른 오빠들보다 더 견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니, 그런 그를 내가 30년 넘게 사랑하고 있다는 데에 자부심이 느껴진다. <동사서독>, <중경삼림>, <비정성시>, <아비정전>처럼 멋있는 작품도 많았지만 <동성서취>, <아비와 아기>, <취가박당>과 같은 코믹하거나 좀 의아한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오빠가 소시지 입술을 하고 우스꽝스럽게 화면을 누빌 때 받은 상처는 진작에 치유되었다. 1983년이 공식데뷔라고 하니 40년 경력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작품을 했겠는가! 그중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역할도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가 나처럼 B급 정서를 정서비급(情緖祕笈)처럼 품고 산 사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를 처음 본 것은 드라마이지만 이제 그는 드라마보다는 영화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가끔. 하지만 그가 출연한 작품들이 많으니 골라보는 재미가 있다. 그의 풋풋한 모습이 보고 싶다면 <의천도룡기>와 <양가장>을 추천한다. 작품성이나 재미로 보자면 <의천도룡기>가 더 좋지만 중드를 썩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양가장>이 더 좋을 것 같다. 6회분의 짧은 드라마이고 량차오웨이 뿐만 아니라 류더화(유덕화), 저우룬파(주윤발), 장만위(장만옥), 우멍다(오맹달), 류자링(유가령)도 나오는 추억의 배우 종합 선물 세트 드라마이다. 물론 그땐 라이징 스타 종합 선물 세트 드라마였겠지만. 좀더 세련된 종합선물세트를 보고 싶다면 영화 <무간도> 시리즈가 역시 좋다.
내가 그를 좋아하던 시절에도 그의 곁에는 류자링(유가령)이 함께 있었다. 지금은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사람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이해하고 있지만 사춘기 소녀에겐 그런 너그러움 따윈 없었다. 좋게 봐도 세상 악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녀일 뿐이었다. 그녀가 너무 견고하게 버티고 있어서 "양조위하고 결혼할 거야!"라는 꿈은 꾸지도 못했다. 대신 풍문으로 홍콩 여행을 가면 길에서 배우들이 발에 치인다길래, 언젠가 홍콩 길바닥에서 우연히 량차오웨이도 만나고 리밍(여명)도 만나는 꿈을 품었었다. 이 글을 쓰며 30년동안 왜 홍콩에 가서 꿈을 이룰 생각을 못했나 후회가 된다. 어쩌면 가도 못 만날 게 겁난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꿈을 그저 간직만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죽기 전에 단 한 번은 그를 가까이에서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