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변 Oct 23. 2024

'평균적 인간'을 찾는 실험의 충격적 결과

똥차 OUTSIDE 5 (평균 이야기)

평균은 상황에 따라 바뀐다


2024년 여름 기록적인 폭염을 느끼며 외근을 다녔다. 오장육부가 수분 부족으로 건조해지고 반팔 셔츠는 육수로 흥건하게 젖었다. 더 있으면 탈수다. 비상상황이니 시원한 곳을 찾아 커피숍에 들어갔다. 에어컨 바람을 마주하며 정신을 차려보니 갈색인테리어에 한자와 한글이 어우러진 가게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아메리카노가 지친 몸에 수분과 카페인을 공급해 주며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역시 맛있는 커피는 고소한 맛, 탄맛, 신맛, 단맛 등이 협연하여 혓바닥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뤄야 해"라는 커피전문가 행세를 하며 똥폼을 잡고 있었다. 뜨거운 레이저빔 태양을 피해 창가에 앉아 커피를 음미하는 재미는 무릉도원에 온 기분. 커피숍에서 사람들의 천태만상을 관찰하던 중 유독 임산부가 많이 보였다.


"저출산 시대라는데 어쩜 이리 임산부가 많이 보일까?" 물론 임신은 축복받을 일이고 기쁜 일이지만, 호기심은 멈추지 않는다. "결혼도 안 하고 출산도 안 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임산부가 많지?"


의문은 매우 빠른 시간 안에 해결됐다. 바로 수도권에서 가장 유명한 산부인과병원 옆에 있었기 때문. 산모들이 자주 들락날락할 수밖에 없는 길목에 내가 있었다. 만일 "저출산 시대라는 소리는 모두 거짓이네?"라는 식으로 판단했다면 큰 틀을 보지 못하고 오류에 빠지고 말 것이다. 평균을 파악하려면 제대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해야 한다. 병원에 가면 아픈 사람만 보이고 술집에 가면 노는 사람만 보인다. 내가 어떠한 집단 속에 들어가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평균은 객관성을 상실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균은 주관적이다.




평균적 여성이 존재한다는 환상이 깨지다


평균이 주관적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객관적 평균은 존재할까? 평균적 인간상을 찾기 위한 역사적 실험을 찾아 떠나본다. 20세기초 어떤 의사와 조각가는 '평균적 여성상'을 만드는 작업을 함께 했다. 그들은 미국 젊은 성인 여성 1만 5천여 명으로부터 신체 치수를 부위별로 수집했다. 평균 체형의 여성상을 만드는 독특한 실험을 한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한 조각상의 이름은 '노르마'.


참고 : 평균의 종말


'노르마'는 미국사회의 신드롬이 되었다. 타임지에도 실리고 CBS방송국에서도 <미국인의 외모>라는 소재로 평균 여성의 신체 치수가 떠들썩하게 소개됐다. 급기야는 '노르마'와 가장 신체 치수가 유사한 여성을 뽑는 대회도 있었다. 이 대회에 3,864명이 참가했는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과연 노르마는 과연 당시 미국 젊은 여성의 평균적 신체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르마는 허상이었다. 9개 항목을 평가했는데 모든 항목에서 평균치에 든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눈높이를 낮추어 5개 항목으로 줄여보아도 평균에 해당하는 여성은 40명도 되지 않았다. 대회의 우승자인 스키드 모어라는 여성조차 평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이는 평균을 신봉하던 미국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평균의 종말' 참고)


평균적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허상이다.



평균은 사기다


위조지폐는 지폐가 아니듯 객관성 없는 평균은 평균이 아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는 눈치게임 사회라 평균을 따라가야만 한다. 눈치를 보며 중간에 수렴하고 평균에 수렴해야 욕 안 먹기 때문. 오죽하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라는 이상한 어록이 속담의 지위를 갖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 하필 우리가 따르던 평균이 가짜 평균이라면? 여기서 대국민 사기극이 발생한다.


상위 10%에는 진입해야 평균인줄 아는 가짜 상향평준화 시대다. 양극화 시대에 평균이란 단어는 이미 객관성을 상실했다. 그래서 요즘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중위값. 가령 소득으로 치면 100명을 줄 세울 때 50번째 위치한 사람의 소득을 중위소득이라고 하는데 역시 센터(중위값)를 잡아줘야 먹어주는 사회인 대한민국이다. 중위값이라는 전문용어로 한가운데를 알려주고 "평균 이하라고 낙담하지 마세요"라는 위로에는 전혀 관심 없다. 왜 그럴까? 인간은 이성적일 것 같지만 감성의 지배를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평균과 중위값 다 필요 없다. 우리는 옆 사람과 비교하는 감성적 존재다. 옆 사람을 이겨야 하고 옆 사람보다 못하면 슬퍼하고 화가 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속한 집단의 분위기를 모방하며 기준점으로 삼는다. 내가 속한 집단 안에서 나의 행복과 불행을 비교, 해석한다.


SNS는 비교와 서열을 좋아하는 대한민국 토착문화와 만나 평균의 오류를 범했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은 신음중이다.


"꿈이 없다",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가 왕왕 들린다. 비혼주의, 저출산도 늘어간다. 물론 그것이 전 세계적인 트렌드이긴 하나, 신념적 비혼주의와 저출산을 제외하면 어떨까? 주거의 표준이 올라갔기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못하는 것이 아닐까? 10년 전만 해도 20평짜리 30년 넘은 아파트 구축에서 신혼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얼죽신(얼어 죽어도 신축)이라는 말까지 생기며 '주거의 평균'에 대한 거품이 극에 달한다. 평균이라는 신뢰 못할 지표가 많이 올라갔다.


'똥차 실험'을 통해 '평균 인간 찾기 실험'까지 진출했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평균은 원래부터 객관적이지 않으며 평균적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객관성을 상실한 평균을 믿고 살았다. 우리에게 잘 못이 없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다만, 평균의 오류에 빠져 살았다는 것이 속상할 뿐.


평균 찾지 말자! 나만 바라보자!
더 행복할 수 있도록.



+당연히 자동차 구매에도 평균은 없다. 내 상황에 맞춰서 타고 다니자!



이전 13화 원나잇보다 달콤하고 섹시한 원나이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