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의 재발견

by 레지널드

요 며칠 날씨가 심상치 않다. 정말 춥다.

춥다는 말을 지겹도록 내뱉었지만 도무지

언론에서도, 사람들의 입에서도, 내 입에서도

한파라는 단어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불과 몇 주 전

"이번 겨울은 너무 안 춥네.

겨울은 추운 맛이 있어야 하는데"

라고 생각 없이 떠든 내 입을 원망해 본다.


하도 겁을 주는 바람에

수도계량기가 실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헌 옷을 집어넣었고 난방비 걱정은

다음 달 고지서를 받는 나에게 넘기기로 하고

이번 달의 나는 따뜻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에

보일러도 가동시간을 늘렸다.


집에서는 대비를 철저히 했지만

출퇴근만큼은 참 힘들다.

아무리 따뜻하게 입어도 춥다.

걸어서 출퇴근하는 게 습관이 됐기에

내 머릿속에서 대중교통은 아예 선택지에 없었다.

그렇게 나선 출근길, 춥다..

따뜻한 방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그 아침출근길을 생각하면 살짝 서늘 해질 정도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그래도 춥다고

웅크리고 걷지 않고 당당하게 어깨를 쫙 펴고 걷는다.

방금 전보다 기분이 조금 나아지긴 했으나

곧이어 바로 강한 바람이 나를 엄습해 온다.


빨리 걸으면 좀 덜 춥겠지 라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더욱 재촉해 본다.

출근길, 내가 항상 아차산을 바라보는 신호등이 있다.

물론 타이밍 맞춰서 파란불이 켜지면

못 보고 그냥 지나가지만

추운 날은 마치 머피의 법칙처럼

방금 빨간불로 바뀌었다.

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추위를 달래보다

고개를 들어 아차산을 바라봤다.

추운 공기 때문인지 산이 유난히도 청명해 보였다.

중국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가

이 찬 공기를 뚫지 못해, 대기질이 굉장히 좋았던 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안 좋은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요소 하나는

반드시 있는 이 세상사의 법칙,

마찬가지로 이 강추위에도 장점은 있었던 것이다.


늘 우리의 시야를 뿌옇게 했던

미세먼지가 사라지니 내 마음도 덩달아 깨끗해졌다.

이 이야기를 직장동료에게 하니

그 또한 내 의견에 공감했다.

특히나 그는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도

미세먼지보다는 차라리 추위가 낫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배운 삼한사온은 옛말이 되었고

추운 겨울 속 가끔 기온이 오르면

미세먼지 수치도 덩달아 오른다.

아무리 마스크로 코와 입을 덮어도

우리는 미세먼지를 피할 수 없다.

추운 게 훨씬 남는 장사다.


신선한 공기 외에도 추위가 가져다주는

뜻밖의 이점은 몇 가지 더 있다.

말로는 춥다, 춥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럴 때 제일 따뜻함을 누린다.

sauna-9459148_1920.jpg 출처: 픽사 베이

따스한 차 한 모금이 마치

정맥을 타고 흐르는 듯 몸을 감싸고

육체적, 정신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사실을

이때 아니면 언제 체감할 수 있겠나.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부는 어느 저녁,

국밥집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느껴지는 따뜻함.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 속으로

숟가락을 담근 뒤 들어 올린 첫 입에

하루의 고단함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이 감정 역시 기온이 내려갈수록 반비례하여 올라간다.


흔히 가을을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표현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독서하기 정말 좋은 계절은 겨울이다.

가을은 하늘도 푸르르고 단풍도 멋있는데

눈에 책이 쉽게 들어올 리 만무하다.

책과 친해지기에는 겨울이 최고다.

바깥활동하기에 너무나도 추운 이때,

보일러나 히터를 켜고 조용히

독서에 몰입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특히 겨울은 창문을 다 닫아놓기에

다른 계절과 다르게 밖에서 나는 소음도

몰입을 방해하지 못한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는

낭만 또한 추울수록 더 짙어진다.


한파가 가져다주는 또 다른 장점은

바로 우리가 따뜻한 피를 품은 사람들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이런

혹한의 날씨에 좁은 골방에서

조그마한 전기난로에 의지해 사는

독거노인이라든지 난방비 걱정에

난방을 못하는 가정의 아이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럴 때 우리 마음속은 어떤가.

제 아무리 남일에 관심 없는 사람일지라도

잠시동안은 그들을 걱정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기부도 하고,

신앙심이 깊은 이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드릴 것이다.

이렇게 한 번도 본적 없는 누군가를

아무런 대가 없이 도와주고

걱정해 주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란 걸

증명하는 것 아니겠는가.


춥다는 이유만으로 몸과 마음을 웅크리고 있기에는

우리가 느껴야 할 행복과 즐겨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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