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고 확인하는 나, 피곤해도 어쩔 수 없다
긴 연휴를 이용해 오래전부터 계획해 온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는 거라 아침부터 설레었다.
며칠 전부터 캐리어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빠진 건 없는지, 더 추가해야 할 건 없는지 등등
동선부터 시작해서 예매내역, 옷가지와 물품까지.
당일날 아침이 되어서는 더 신경 쓰였다.
면도기와 폼클렌징, 로션과 선크림 등
출발 직전에 챙겨야 하는 물건들까지 다 넣었다.
그리고 여권과 신용카드를 확인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다.
수첩을 다시 꺼내 리스트를 확인한다.
'이건 넣었고, 이건 아내 가방에 있고..'
그러고 나서 다시 여권과 신용카드를 확인한다.
집을 나서기 직전, 정말 마지막으로 집안을 쓱 훑는다.
필수 전력을 제외한 나머지 코드들이 다 뽑혀있고
창문까지 확실하게 닫힌 걸 확인하고 현관문을 닫는다.
공항버스를 타러 가는 길, 여권과 카드를 확인해 본다.
여행지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호텔방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내 가방을 들여다 보고
심지어 호텔 방문도 잡아당겨본다.
이런 나를 보고 아내는 '어디 특사로 가는 거냐'며 웃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나의 습관은 역사가 꽤 길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분명히 문을 열쇠로 잠그고 나왔다.
그런데 밖에서 놀고 있던 나를 누나가 황급히 불러
집에 가보니 집안은 온통 어질러져있었다. 도둑이 든 것이다.
이사를 앞두고 있던 우리 집은 당시 제법
많은 양의 현금을 갖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현금은 없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도둑은 우리 집에서 귀금속, 돈 될만한 건 가져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트라우마가 되어 나는
현관문을 두 번 이상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회사에 출근하는 엄마, 일찍 등교하는 누나에 이어
맨 마지막으로 나갔던 나는 현관문뿐만이 아니라
별의별 걸 다 체크했다.
가스 밸브, 여름엔 선풍기, 겨울엔 전기담요까지
체크해야 할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빨리 준비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시험을 볼 때도 난 OMR카드를 최소 세 번 확인했다.
심지어 몰라서 찍은 문제여도 꼼꼼히 확인했다.
내가 이렇게 여러 번 체크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실수가 나왔기 때문이다.
(몰론, 도둑맞은 건 지금도 내 잘못이 아니라 확신한다)
교과서도 가끔씩 빼먹을 때가 있었고
장시간 외출은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선풍기를 틀고 나온 적도 있었고 라디오를 켜놓고 나온 적도 있었다.
작년에 아내와 여행을 갔을 땐 수수료를 아껴주는
신용카드가 있다길래 큰맘 먹고 발급받았는데
놓고 왔어서 수수료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여행기간 중 환율이 급등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후 더욱더 심혈을 기울여 확인한다.
이런 나의 습관이 크게 도움 된 적도 많이 있다.
바로 군대 있을 때. 선임들은 훈련을 앞두고
여러 번 장비점검을 하는 나를 좋아했고
내가 선임이 되었을 때 간부들은 내가 있던 분대는 크게 터치하지 않았다.
지금도 이 습관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심리적인 변화는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번 확인했음에도 내가 뭔가를 안 가져오거나
잘못 챙겼다면 나는 무척이나 불안해한다.
물론 차선책을 마련하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불안함이 엄습해 와서 더 일이 꼬인다.
이제는 불안해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방안을 찾으려고 한다.
내가 불안해하면 주변사람들도 덩달아 불안해하기에 의연해지기로 했다.
불을 켜놓고 나왔으면 '전기료 좀 더 내겠군'.
선풍기를 켜놓고 나오면
'그거 하나 켜놓고 나왔다고 불나는 제품이면 이미 진작에 났겠지',
온열기구를 켜놓고 나오면 근처에 사시는
장모님께 좀 부탁드리면 된다.
여행지에서 쓸 카드나 현금을 놓고 왔다?
까짓 거 일행한테 부탁하거나 수수료 더 내고 현지에서 환전하면 된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사건을 바라봐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이미 벌어진 사건이자, 놓고 온 물건이고,
켜져 있는 선풍기인데 어쩌겠는가.
해결할 수 없는 과거를 붙잡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대응책을 찾아야지.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연진이 엄마도 결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대사를 한다.
"해결책은 뒤에 없어. 앞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