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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Jan 09. 2023

나의 남자 사람 친구


시골 동네에서 함께 자란 친구가 있다. 나의 남자 사람 친구 김 군.

초등학교부터 쭉 무언가를 같이 해왔으니 그 세월이 얼마인가.


초등학교 6학년. 학교를 마치고 세명의 남자애들이 자전거 뒤에 여자 한 명씩을 태우고 포카리스웨트 광고를 찍곤 했는데 그 연상되는 상큼한 배경음악이 무색하게 뒤에 앉은 우리 소녀들의 기럭지는 다소 짧았고, 질끈 올려 묶은 머리카락은 휘날리지 못했다. 그래도 소년들이 확장시켜주는 세계가 좋았고, 자전거에 실린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예측할 수 없는 나아감이 좋았다. 양 옆으로 메타세쿼이아가 빼곡하게 심겨 있는 끝도 없는 흙길을 달리곤 했는데, 그 길에 대한 기억이 너무 좋아서인지 나는 영화 '편지'가 나왔을 때 동시상영 극장에 가서 몇 번을 더 볼 정도로 그 영화의 감상에 빠지곤 했다. 그 영화는 나의 어린 마음이 내달리던 그 초록색 길을 생각나게 했다. 그곳에도 물론 김 군이 있었다.


그 시기 한창 밤샘 공부가 유행을 했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앞둔 전날 누군가의 집에 모여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전교 순위권이 이 무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했던 것은 학습이라기보다는 인생공부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남녀가 우르르 모여 노는 것 같은데 공부라는 그럴듯한 핑계가 있으니 이를 제안받은 부모도 처음엔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공부를 하겠다며, 모르는 것은 친구에게 물어서 하겠다며, 포부에 가득 찬, 전엔 볼 수 없었던 새까만 눈을 빛내는 아이들에게 끝내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한 몇몇의 부모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모인 우리는 가끔은 책을 보면서 수다를 떨었다. 잠이 너무 올 때면 밖으로 우르르 나가 총총히 뜬 밤별 아래 곱게 내려앉은 달빛이 되기도 했다. 그때 희뿌옇던 가로등은 먼지 한올까지 적나라하게 비추며 우리를 조망했었는데 우리의 마음까지 스캔하듯 내리비추는 가로등 때문에 누군가는 드러나려는 마음을 재킷으로 다급히 가리기도 했다. 그 아래에서 우린 마치 인생을 다 아는 듯 조정현의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를 부르곤 했다. 혼자만의 사랑, 그리움, 외로움 따위의 가사가 사춘기 어린 소년 소녀들의 허세를 채울 때에도 가로등은 노년의 관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총총히 빛나는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자만의 사랑은 슬퍼지는 거라 말하지 말아요. 그대 향한 그리움은 나만의 것인데 외로움에 가슴 아파도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

 

김 군의 집을 우리는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부모님도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며 맞아주었다. 김 군의 방에서 놀다 지치면 김 군의 책상을 뒤져서 허물을 찾곤 했는데 그날 우리 눈에 띈 것은 일기장이었다. 이를 읽고 말겠다고 덤비는 자와 사수를 하고자 온몸을 날리는 김 군 간의 짧은 설전 후 결국 일기장은 우리가 쟁취를 했다. 포기한 듯한 김 군을 뒤로하고 우린 키득대며 일기장을 읽었다. 아뿔싸. 밤샘 공부를 하던 날 새벽, 김 군의 행적. 곤히 잠든 내게로 와 나의 옆머리를 살포시 넘겨주고, 나의 불그스레한 볼에 뽀뽀를 하였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날 그렇게 별도, 달도 빛나더라니. 일렁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김 군은 마음이 시키는 일을 거역할 없어 저도 모르게 소녀의 볼을 훔친 것이다. 그날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인사를 하고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고무줄 뛰기나 공기놀이나 하며 뛰어놀던 말괄량이 소녀에게 소년의 마음은 너무 버겁고 성숙한 것이었다. 잠시 절교 기간이 있었다. 훗.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우리 아빠를 만나면 자전거에서 내려서서 인사를 하곤 하던 바른 소년이었고, 어떤 일에서도 바른 길을 찾아가던 아이였다. 그리고 늘 나보다 한 발짝쯤 성숙한 아이였다. 나보다 앞서 소설을 읽고, 시를 읽고, 늘 나보다 앞서 아픔을 경험했다.


나도 김 군도 고등학교를 도시로 나오면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학교는 다행히 가까이에 있어서 우리는 집을 떠나온 헛헛하고 외로운 마음을 서로 위로하곤 했다. 그즈음 김 군은 부모의 불화로 마음이 고단했고, 그러한 고민들을 들려주는 김 군 옆에서 늘 털어놓을 마음이 없어 고민을 하던 내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사이라 여겨지던 때 딱히 인생의 고단함을 논할 거리가 없는 나의 단조로운 삶이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김 군은 늘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같이 들어주었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어주었고, 가끔 마음을 적은 시를 보여주었다. 김 군은 늘 시 속에서 나보다 몇 곱절 나이 많은 이가 되어 고달픈 생을 살아내고 있었다.


서로 다른 질감의 외로움을 가슴 깊이 느낄 때 우린 우정과 사랑 사이를 잠시 오간 적도 있다. 내가 아픈 김 군을 꼬옥 안아주고 싶을 때, 그가 나의 여린 마음을 토닥이고 싶을 때, 때로 서로에 대한 감정이 글이 되어 나올 때. 그래도 언제나 먼저 헤어 나오는 이는 나였다. 그렇게 김 군은 조금 더 기운 마음으로, 나는 조금 덜 기운 마음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남자 사람 친구를 외치며 인연을 이어왔다.


김 군은 내 10대의 모든 정서를 함께한 친구이기에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생에 그런 소중한 인연이 늘 곁에 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니 더없이 귀하게 여겨진다.


물론 지금은 각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서로의 삶을 영위하면서 우린 마음으로만 응원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김 군은 시를 쓰던 노트를 모두 없앴다 했고, 만났던 그 언젠가는 이제 글이 잘 안 써진다고 했다.


나는 가끔 김 군의 글이 궁금하다. 그가 펼쳐놓는 세상이 궁금하다. 인생이 잘 이어지지 않을 때, 또는 글이 잘 이어지지 않을 때 나는 가끔 손을 내밀어 물어보고 싶어 진다.


이제 좀 편안해졌냐고, 그렇다면 짧은 시라도 좀 적어보면 어떠하겠느냐고, 너의 삶은 언제나 시 안에서 더 빛났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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