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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Mar 20. 2023

필라테스 강사가 날씬하지 않은데요


저녁 8시. 가벼운 점퍼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필라테스는 전화로 등록을 하고 운동할 날짜는 앱으로 예약을 한 터라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지는 안내를 받지 못했다. 멀리서 건물을 보니 세 개의 층에 불빛이 환하다. 저곳 중 한 곳일 거라 짐작을 하며 횡단보도 앞에 섰다.


마침 옆에 젊은 여자가 선다. 레깅스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것을 보니 나와 목적지가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닥으로 올려 묶은 머리가 어려 보인다. 그녀는 이어폰을 끼고 정면을 주시한다. 다행히 같은 건물로 들어선다. 저기... 죄송한데요. 혹시 매트 필라테스가 몇 층에서 하는지 아세요? 그녀는 무표정하게 4층이요, 라고 말하며 잠시 뺐던 이어폰을 다시 꽂으며 이내 입을 다문다. 나와는 다른 운동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같은 곳이라면 보통 저도 같은 수업 들어요, 라든지 저도 4층에 가는데요, 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4층을 눌렀는데 의외로 그녀는 다른 층을 누르지 않았다. 4층에 도착하자 그녀는 서둘러 내려 오른쪽 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는다. 두리번거리다가 그녀가 방금 들어간 곳이 그 수업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구에 어색하게 들어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나를 분명 그녀는 보았다. 그럼에도 전혀 관심 없는 듯한 표정이다. 눈치껏 매트를 가져와 바닥에 깔았다. 방금 들어온 누군가가 모퉁이에서 무언가 꺼내오는 것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다른 이들의 옆자리에 그날의 기구가 놓여있다. 뒤늦게 기구를 찾아 내 옆에 놓으며 나는 괜스레 나를 앞서 들어가 내 옆에 자리를 잡은 그녀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든다. 매트는 여기 있어요, 라든지 기구는 저기서 가져오시면 돼요, 라고 말해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괜스레 혼자 서운해진다.


매트 운동은 기구의 종류에 따라 강사가 달라진다. 오늘 강사는 레깅스와 슬리브리스를 입은 탓에 드러난 곳이 팔뚝뿐이라 자꾸 그곳에 시선이 간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강사의 몸매가 날씬하지가 않다. 탄탄한 몸이지만 건장한 체격이다. 처음 운동을 하려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을 때 표면적으로는 근력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작게 덧붙였다. 가능하면 군살도 좀 없애고 싶어서요. 최근 몇 년간 나는 집에만 오면 지쳐 쓰러지기 일쑤였다. 저녁을 먹기 바쁘게 거의 눕듯이 기대앉아 쉬고만 싶었다. 언제나 피곤했다. 집에서만은 가장 편한 자세로 있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자세로 몸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랐다.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인 몇 해가 지나자 나의 몸은 군살이 붙고 탄력을 잃어갔다. 그러한 이유로 속근육을 만들고 몸매를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 또한 이 운동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필라테스를 가르치며 이 운동을 매일 하였을 그녀의 몸매가 썩 날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필라테스를 꾸준히 한다고 해서 반드시 날씬한 몸매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시사했다. 피부과의 간호사나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는 분들의 피부를 유심히 보던 것과 비슷한 마음이다. 이 피부과에 근무하는 그녀의, 이 화장품을 쓰는 그녀의 피부가 어떤지는 그 제품을 구매하는데 충분한 참고사항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내가 생각했던 얄상한 몸매가 아니다. 운동을 많이 해서 근육이 붙은 몸이라 그런가. 아니면 이 운동을 하면 오히려 저렇게 근육이 붙어 튼실한 몸매가 되는 것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이내 강사의 몸매가 좋으면 호감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필수요소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강사는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니 그 일을 잘하면 되는 것이다. 그녀의 몸매가 그녀의 실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그 사람의 가르치는 실력에 앞서 몸매로 먼저 평가를 한 것에 순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하는 그녀들은 대부분 몸에 밀착된 레깅스를 입고 다소 민망한 포즈를 취하며 깊은 호흡을 내뱉었다. 시간이 지나자 좁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며 적나라한 몸매의 굴곡까지 내보인 그녀들과 조금 가까워진 듯한 착각마저 든다. 우리는 반구 모형의 보수볼 위에서 내 몸의 균형하나 잡지 못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그런 서로를 의지해 탄력을 내던 동지 아니던가. 비록 눈인사는 하지 않았더라도 울퉁 불퉁한 살집을 내보이고서도 서로 민망해하지 않도록 시선을 거두던 배려 깊은 사이 아니었던가. 마치 목욕을 같이 하고 나온 친구에게 이제 더 이상 못 보일 것이 없겠단 생각이 들며 오히려 깊은 우정이 샘솟곤 하던 친밀감마저 드는 것이다.  


운동이 끝나자 그녀들은 일사불란하게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우르르 올라타고는 모두 휴대폰만 바라본다. 조금 전 땀까지 흘리며 내적 우정을 다지던 그녀들은 냉랭해진 외부의 온도만큼 성큼 멀어진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만 보일 수 있는 살집까지 보이던 그들은 순간 가장 먼 모습이 되어 다시 떠난다. 조금 가까워졌다 생각하고 반 발짝 다가갔더니 상대는 정색을 하고 물러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 쌓아 올린 친분의 성 앞에 조금 외로운 마음이 들었다.


나 역시 그곳에서 의도치 않은 친분을 쌓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걱정하는 쪽이었다. 운동이 부가적인 모임으로 연결되거나 과한 소속감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과한 친분은 원하지 않았기에 나 역시 그렇게 가까워질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작은 호의가 아니던가. 운동 장소가 이곳이라 알려준다거나. 문을 잠시 잡아준다거나. 어리둥절해할 때 도와준다거나. 헤어지며 작은 목례를 한다거나. 내가 바란 것은 단지 이런 소소한 호의일 뿐이었다. 하지만 삭막한 세상에서 그런 마음을 바란 것이 오히려 나의 괜한 기대였는지도 모르겠다. 호의는 말 그대로 절로 우러나서 베푸는 친절한 마음일 뿐이므로 미리 바라고 못내 서운해할 일은 아닌 것이다.


나는 필라테스 강사의 몸매는 당연히 늘씬할 것이라는, 또는 누군가의 호의가 당연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었나 보다. 운동을 하며 다져야 할 것은 잦은 내처짐을 이겨내는 마음의 속근육뿐만 아니라 생각의 군살을 없애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번엔 나도 조금 토라져서 마음속으로도 가까워지지 않을 생각이다.



# 그림 출처 : 리포즈플라테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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