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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Mar 24. 2023

유교걸, 어쩌다 레깅스를 입다


나는 길을 가다가도 나와 같은 직군의 사람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그들만의 복장이 있다. 촌스럽게 단정한, 또는 말끔하지만 세련되지는 않은. 흑화가 된 듯한 어두운 기운과 함께 저 멀리 서 있어도 같은 부류인 것이 느껴진다. 그들은 절대 튀지 않고 적당히 묻힐 수 있는 디자인과 색상을 선호한다. 언제 어느 날 장례식장에 갈 일이 생기더라도 크게 부담될 것 없는 복장이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를 말한다. 요즘은 젊은 직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달라진 면이 없지 않다.  


나 역시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마주치던 아파트 주민을 나중에 따로 만나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도 나를 처음 봤을 때 단번에 공무원 아니면 선생님일 것이라 추측했단다. 나름의 패션 센스를 발휘했다지만 정형적인 모습이 느껴졌을 것이다. 대신 그런 나의 복장을 우리 엄마는 늘 흡족해하셨다. 한창 힙합에 빠져 통이 너른 바지로 동네 낙엽을 다 쓸고 다니던 여동생에 비하면 단정 했으니까.


내가 공무원이 아니었다면 염색도 자유롭게 해 보고 옷도 좀 화려하고 프리한 스타일로 입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늘 마음 한 편에 있었다. 내 안에 자유를 갈망하는 불타는 욕망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휴직을 하고 충분한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불씨가 고작 저지른 일이라곤 네일아트를 시도해 본 것이 전부다. 결재서류를 내밀며 보이는 이 너무 튈까 싶어 못했던 것이라 큰 마음을 먹고 한 것인데 그 다채로운 색상의 향연 속에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옅은 복숭아빛 색상이었다. 엷게 그러데이션 되어 신부에게나 어울릴법한 너무나도 단정한 색상. 뼛속까지 정형적인 인간이 된 나는 아무 눈치 볼 것이 없음에도 자유롭게 펼쳐지지가 않았다.  


불씨가 화르르 한 번 타오르지도 못하고 그을음만 남은 어설픈 유교걸인 내게 필라테스 복장인 레깅스는 다소 부담스러운 복장이었다. 단점을 커버하고 장점을 부각하는 방식의 착장으로 겨우 눈속임을 하던 몸인데 하필 레깅스는 단점만을 부각하는 옷이었다. 여간 날씬하지 않고는 소화하기 힘든 옷 아니던가. 내가 입는 것뿐만 아니라 남이 입은 모습을 보는 것 역시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밀착된 옷을 입고 몸 선을 살피며 동작의 정확성을 파악하는 그들 속에서 헐렁한 팬츠와 품이 큰 티셔츠를 입고 앞섶을 여미며 옷자락을 휘날리는 나는 홀로 조선에서 온 여인 같았다. 탐색전은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판단이 들던 날 너무도 나다운 무채색 계열의 레깅스와 엉덩이를 덮는 티셔츠를 주문했다.


필라테스를 하며 가장 어려운 일은 의외로 전면 거울 속의 나를 마주하는 일이다. 얼굴만 겨우 보이던 거울을 볼 때에도 한 번씩은 내가 생각하던 얼굴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발동하여 평소엔 자신을 희미한 이미지로만 기억하는 것인지 실제 얼굴을 볼 때면 자꾸 부정하게 되곤 했다.


그중 얼굴이 가장 리얼하게 보이는 곳은 단연코 미용실이다. 염색을 위해 앞머리를 훌러덩 넘기고 납작하게 머리카락을 붙이고 샴푸로 반쯤 지워진 눈썹을 한 내 모습이 언제나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남자친구를 데리고 와서 머리를 하던 여자들이 제일 이해되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런 모습이 이뻐 보이긴 힘들 텐데 그렇게 적나라한 모습을 굳이 왜 보이는 것인지. 그런 모습까지 수용할 수 있는 찐사랑을 판별하기 위한 암묵적 장소로 미용실이 이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하물며 전신을 마주하는 일은 어떠랴. 나는 주로 끝 라인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며 최대한 거울에서 멀리 앉았다. 강사의 시범 포즈와 앞에 앉은 이들의 뒷모습에 애써 시선을 보내며 거울을 외면하는 일이 더 많았다. 


하지만 불현듯 어쩌면 거울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너머의 모습이 나의 실제일 수도 있지 않은가. 지금 고개 숙이고 마주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알고 보면 정작 거울 속 모습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삶을 살다가 거울을 마주할 때나 만나게 되는 사이. 그럼 제대로 된 삶은 거울 속의 그녀가 살아낼 것이니 나는 이곳에서 좀 대충 살아도 되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레깅스를 입어선지 기댈 곳이 생겨선지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한다. 실제의 삶을 살아내느라 고단한 듯한 그녀가 보인다. 거울 속 모습일 뿐인 나는 조금 서툴러도 괜찮다. 누군가 늘 지켜보는 것도 아니니 조금 흐트러져도 괜찮다.


운동을 마치고 나오며 근육들은 봉기한 투사같이 달려드는 느낌이지만 의외로 마음은 저만치 선 바람 같았다.  



# 그림 출처 : 리포즈플라테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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