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한 달 정도 해야 채울 수 있는 걸음수를 남들은 하루 만에 달성하기도 했다. 힐 때문에 나는 늘 다리와 허리가 아팠다. 어쩌다 한 번씩 힐을 신지 않은 날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망치질이 되고 있는 못처럼 걸을수록 자신감이 내리 꽂히곤 했다. 그런 날은 가급적 일어서는 일을 삼갔다. 누가 불러도 냉큼 일어나지 않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도도한 자세로 앉아서 말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쉬면서 나는 매일 운동화를 신는다. 그리고 내가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힐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근육을 바짝 세워 긴장을 유지하느라 금방 피곤해졌던 것이다. 운동화를 신고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으니 걷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매일 동네를 걷는다.
동생과 같은 시간에 나가 통화를 하며 각자의 동네를 걷는다. 조금 귀찮은 날도 있지만 동생이 당연한 듯 나가자고 하면 나도 모르게 알겠다고 대답을 하게 된다. 혼자서 무언가를 하려 할 때는 설득해야 하는 자가 의지 약한 나뿐이라 철수가 쉬웠지만 한 사람이라도 같이 엮이게 되니 의지도 조금 체면이 생기는 듯하다. 합리화가 빠르고 쉽게 체념하는 두 인간이 서로의 연약함에 기대어 끌어낸 상승효과다.
매일 다른 코스를 정하여 걷는데 오늘은 골목길이었다. 골목은 비좁고 모난 길이 끊어지듯 이어져 있었다. 곳곳에 외벽을 타고 노출된 가스 배관이 건물 사이에 걸려 있었다. 노란색 가스 배관은 마치 한 코라도 빠지면 느슨해지는 뜨개실이 된 듯 서로를 잇대고 있었다. 그곳은 그런 친밀함이 있어선지 때로 경계가 없었다. 대문을 열고 작은 돌을 괴어 고단한 일상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밀한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낸 빨래가 한 줌 빛을 바라고 서있기도 했다. 또는 자전거 잠금장치로 사용하던 줄이 대문 손잡이에 풀린 듯 걸려 있기도 했다. 마음을 여미기에 바쁜 그들은 집안 매무새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듯 느껴졌다.
모퉁이를 돌아섰는데 하얀색 입자가 포르르 날아오른다. 먼지인가 해서 다급히 마스크를 올려 쓰고 보니 날리는 벚꽃 잎이었다. 좁은 그곳에서도 바람은 곧잘 길을 찾았고 어김없이 어디론가 흘러갔다. 마치 골목길이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그 호흡을 따라 꽃잎이 날아올랐다가 휘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길을 걷다 멈춰 서서 그곳이 호흡이 시작되는 곳인지 머물러 있는 곳인지 가늠하곤 했다. 규칙적인 호흡을 따라 골목길 전체가 한 번씩 들썩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다 제자리를 미처 찾지 못한 길은 각도를 조금 달리하여 내려앉았을 것이다.
저녁에 다시 운동을 갔다. 오늘은 필라테스를 등록한 첫날이다.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데, 마땅한 종목을 고르는데, 상담 방문을 하는데, 그리고 드디어 등록을 하기까지 각각의 고비마다 아주 여러 날이 걸렸다. 겨우내 상담을 하러 갔을 때에는 한 번도 운동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고, 심지어 운동을 싫어하고, 유연성은 물론 끈기도 없으며 조금만 무리하면 몸살이 나버리는 나 같은 사람도 운동을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등록 인원을 늘려야 하는 학원의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답안을 내놓았지만 나는 그럼에도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나에겐 매트 필라테스를 권했다. 입문자가 가장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운동이라 했다. 내가 알던 필라테스는 몸에 딱 붙는 레깅스와 브라톱을 입고 기구를 휘휘 돌며 다리를 무한대로 찢으면서도 안온한 표정을 짓곤 하던 티브이 속 연예인의 모습이 전부였기에 조금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매트 필라테스는 작은 매트 위에서 소도구를 활용한 스트레칭이 주를 이뤘다. 티브이 속에서 보던 브라톱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고 적당히 편한 운동복이나 레깅스를 입고 편한 티셔츠를 입은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낮은 조명 아래 경음악이 흘렀고 운동하는 이들의 호흡소리만 정적을 메웠다. 스읍-후우. 요가가 복식호흡을 하는 운동이라면 필라테스는 폐를 사용한 흉식호흡을 하는 운동이라 했다.
강사는 희한한 동작을 절묘한 언어를 사용하여 묘사했고 그 복잡한 어휘만큼 몸 안의 근육들도 복잡한 심경임이 느껴졌다.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사용하다 보니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부들부들 떨거나 두두둑 소리를 내곤 했다. 가끔은 호흡을 놓쳐 연달아 숨을 들이마시느라 자체 심폐소생술이 필요하기도 했다. 스읍-후우. 이렇게 내가 호흡하는 소리에 집중해 본 적이 있었던가. 어느새 뭉근하게 땀이 솟아났다. 집에서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스트레칭이지만 나 혼자 했다면 얼마 못 가 분명 드러누웠을 것이다. 그리곤 누워서 할 수 있는 운동 따위를 검색하다가 이내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선 남들 비슷하게라도 따라 하느라 중간에 흐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의지가 약하고 게으른 자에게 이보다 더 좋은 자극은 없다 생각하니 새삼 등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매트 위에서 몸의 경직과 이완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모두 호흡과 같이 이루어졌다. 폐를 통해 호흡이 드나드는 게 느껴졌고 어깨에서 시작된 통증이 발끝까지 아릿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하얀 벚꽃 잎 하나가 내 몸속 이곳저곳을 돌며 길을 찾는 듯했다. 끊어지듯 이어진 내 몸속의 작은 골목길을 헤매다 한 번씩 숨을 고를 때마다 잔잔하게 떠있는 듯했다.
나는 내 몸속 바람길을 찾는 중이다. 벚꽃 한 잎 무사히 나릴 수 있도록 고른 길을 내볼 생각이다.
# 그림 출처 : 리포즈플라테스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