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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달그 Feb 26. 2022

그 웃음만으로


지난겨울 제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언니. 올 한해 어땠어?”

그녀가 성인이 되고부터는 호칭이 선생님에서 언니로 바뀌었다.

나는 언니라고 부르는 게 더 좋았다.

“응. 정말 만족스러운 해였어.”

한 해의 삶을 돌아보며 만족을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내 일기장에 써놓은 소소한 것들이 이루어졌어. 작업도 계속할 수 있었고 너와 가끔 만나 함께 밥 먹고 이야기하는 게 좋았어.”

두 사람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첫아이가 세 살 되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전화벨이 울려 받았더니 우리 집으로 가져다줄 것이 있다며 온다고 했다. 만나는 날짜를 약속하고 마침내 그날이 되었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그녀를 마중 나갔다. 조금 지나니 버스에서 그녀가 내렸다. 그것도 비닐끈으로 묶은 무거운 책 한질을 가지고 말이다. 전에 아이가 자연관찰 책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뜨거운 날씨에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무거운 책 더미를 들고 여기까지 온 것을 생각하니 말문이 막혔다. 그것이 우리의 만남을 현재까지 이어온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그녀를 이야기할 때는 제자라고 하지만 혼자서는 친구라 부른다. 이제 그녀는 29살이 되었다.

나에게 겨울은 늘 길었다. 그래서 더 추웠다. 고등학교까지 시골에서 살다가 소도시로 혼자 오게 되었다. 겁 많았던 나에겐 대도시나 다름없었다. 사람이 적은 마을에서 수시로 바깥 풍경을 보며 사색에 잠기기를 즐겼던 시간은 도시생활 이후로는 허락되지 않았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고 여전히 처음의 낯선 모습처럼 내 눈엔 그렇게만 보였다. 그런 나에게 군산 토박이인 그녀는 참 따뜻하게 다가와 주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미술 학원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늘 진심이었다. 부지런하고 긍정적이며 자존감도 높은 사람이라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젊었을 때 저런 모습이었다면 지금 보다 훨씬 나았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하지만 난 그녀처럼 될 수 없다. 대신 삶이 나에게 그녀를 보내주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꺼려 했던 터라 고맙다는 표현도 애정이 담긴 말도 제대로 전하는 법을 몰라 나도 모르게 서운함을 안겨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한 발식 나에게 다가왔고 결국 나도 문을 열었다. 긴 겨울을 빨리 돌아가게 할 수는 없지만 그 겨울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벗이 생겨 저절로 미소 짓게 된다.

마트에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가 경비실 옆 커다란 라일락 나무를 보았다. 어느새 봄이 다닥다닥 가지마다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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