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웠다. 깍지 낀 양손을 배위에 얹었다. 배가 꺼진 자리에 갈비뼈의 흉곽이 닿았다. 명치 위에 갈비뼈가 있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감각적 느낌이다. 갈비뼈에서 명치를 지나 배꼽까지 활강하는 스키 점프대 처럼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려간다. 지방이 배를 누르지 않으니 숨소리가 조용해졌다. 코고는 소리도 잔잔해졌다. 스르르 눈이 감기고 편안하게 숙면으로 빠져 들었다.
알람이 울렸다. 일어나야 할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배에 손을 얹었다. 배가 잡히지 않는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지방이 배 안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둥글기만 하던 배에 곡선이 생겼다. 곡선을 따라 허리와 사타구니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에 놀랐다. 사람의 몸은 원래 아름다운 것이다. 곡선의 미는 사람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식탐에 눈이 멀어 예술성을 잃은 몸뚱어리로 살아 왔다. 일자형 몸매로 살면 일자형이 당연한 줄 안다. 서서히 드러나는 원초적 몸매가 관능의 매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샤워실 거울에 전신이 비춰진다. 뒤로 볼록한 엉덩이보다 앞으로 나와 있는 배가 더 작다. 처음 보는 현상이다. 늘 배가 컸다. 당연했던 일이 깨졌다. 골반과 위쪽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배 아래에 이런 광활한 영토가 숨겨져 있었다니 신대륙의 발견이다. 측면의 흉곽에서 시작된 근육이 허리와 골반을 지나 사타구니까지 근육 선을 그리며 지나간다. 그렇게 어렵다던 뱃살의 지방이 빠지고 있다.뱃살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부분이다. 신기하다. 자신의 몸인데도 처음 본다. 허리와 어깨의 길이가 두 배 차이가 난다. 근육에 밀려난 몸 속의 지방이 마지막으로 모여든 곳이 배다. 배는 발악을 하듯 똘똘 뭉쳐있다. 배가 마지막 승부처다. 뱃살 빼는 것이 가장 어렵다. 최후까지 버티는 힘이 있다. 처음으로 영양분을 축적하는 곳이다. 이전의 몸으로 되돌리는 시작점이다.
가만히 숨을 내쉬고 멈췄다. 내보낸 공기만큼 가벼워 지길 바랬다. 체중계에 살며시 올라서니 디지털 숫자가 78.2에서 깜박였다. 11.6kg가 줄었다. 3개월만에 살이 빠졌다. 성취의 짜릿함이 전신을 타고 펴졌다. 현실을 이겨보려는 노력이 뱃살도 빠지게 했다. 가능성이 보이니 의욕이 생겼고 의욕이 생기니 몸이 움직였다. 20년 묵었던 뱃살과는 영영 이별하고 싶다. 뱃살이 날로 늘어나도 그냥 두었다. 배가 나오다 못해 옆으로 퍼지고 다시 아래로 처지면서 배둘레 햄이 됐다. 과체중으로 인해 신진대사 증후군이 반복해서 나타났다. 괴로웠지만 무던히 버텼다. 어차피 빠지지 않을 뱃살이다. 무리한 운동으로 힘들긴 싫다. 먹고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며 고통을 감수하기도 싫다. 대가를 치룰 준비가 되지 않았다. 덕분에 핑크 돼지의 볼록 나온 뱃살은 안전하게 유지되 왔다. 이제 새로운 삶을 위해 이별할 때가 왔다.
다시 3개월이 지났다. 디지털 숫자가 76.6를 가리켰다. 1.6kg이 빠졌다. 체중의 총 감소량은 약 13.2kg이다. 요요를 극복하고 체중이 지속해서 감량한 것이다. 첫 3개월에서는 11.6kg이 줄었는데 두번째 3개월에서는 겨우 1.6kg밖에 줄지 않았다. 벌써 감량의 한계점에 온 듯했다. 먹는 양을 줄이면 근육도 함께 빠진다. 먹는 양을 늘리면 근육이 늘어 나는 대신에 배가 나온다. 난감한 일이다. 체중을 더 빼야 하는지 건강한 몸을 만들어야 하는지 선택을 강요 받고 있다.
여름이 늦어지다 보니 가을과 겨울이 애매하게 겹쳤다. 기온이 낮아지자 몸에서 땀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더운 느낌 정도로 그친다. 몸 속에 축적된 에너지를 태워 없애려면 열이 나야 한다. 작업의 강도는 여름과 다를 바 없는데 낮아진 기온 때문에 열이 나지 않는다. 강도 높은 노동에도 땀이 나질 않으니 소변 횟수가 증가했다. 3시간 반 만에 가던 화장실을 2시간이 채 되지 않아서 간다. 갈증에 목이 타고 소변에 종종걸음을 친다. 몸 속의 수분이 소변으로 나오려고 발버둥친다. 나오려 하지 말고 갈증을 해소해 줬으면 좋겠는데 갈증과 소변은 무관했다.
소화기계로 들어 가는 수분은 갈증을 달래 준다. 배설계의 수분은 소변으로 배출된다. 서로 역할이 명확히 다르다. 소변이 마려웠다. 참았다. 일의 흐름을 끊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안되겠다. 급하게 걸어서 화장실로 가는데 한 방울씩 새는 느낌이 든다. 소변을 조금씩 싸면서 말리면 된다고 했는데 사실 같았다. 내리자 마자 쏟아지던 소변 줄기는 금방 그쳤다. 그렇게나 급했는데 겨우 이만큼 나오려고 발버둥쳤나 어이가 없다.
계절이 바뀌니 쉬지 않고 작업을 해도 땀이 나지 않는다. 같은 노동량인데 땀이 줄었다. 발열이 되야 땀이 나고 땀이 나야 에너지가 소모된다, 에너지 소모가 많을 수록 몸이 가벼워진다. 몸의 작동에 고민이 생겼다. 두꺼운 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뛰기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 내 휘트니스에 가도 된다. 몇 번 갔었는데 지문을 재 등록해도 지문 인식이 되지 않아서 포기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