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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반 홍교사 Sep 23. 2024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는 법

우리 첫째는 뭐든 천천히 하는 편이다. '느리다'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대신 '끝까지' 한다. 생각하는 시간이 길 뿐이다.  그 시간을 기다려 주는 것이 관건이다. 기다리면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다 해낸다. 대충 하지 않는다. '잘'해낸다. 


둘째는 빠른 편이다.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알고 잘 챙긴다. 그리고 먼저 준비하고 엄마를 재촉한다. 다만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걸 알아차리고 기다려 주는 것이 관건이다.



첫째와 둘째는 어느 별에서 왔는지 한 뱃속에서 나왔는데 성향이 참 다르다. 커갈수록 느낀다. 또 아이들이 참 다르기 때문에 서로 도와주면서 그렇게 커가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둘째는 아직 어려서 옷 입는 걸 조금 도와준다. 자기가 입어야 한다는 마음이 들면, 엄마한테 옷을 들고 와서 입혀달라고 재촉하고 누구보다도 빨리, 적극적으로 옷 입기를 마치는 아이인데, 자기가 입기 싫으면 '엄마가 입혀줄 테니까 가만히만 있으라', '시간이 다 되어서 빨리 입어야 한다'라고 아무리 말해도 절대! 말을 듣지 않는다. "엄마 입혀줘"라는 말을 기다려야 한다.


첫째는 엄마가 입혀주든, 자기가 입든 일단 다른 것(주로 책 읽는 것)에 몰두하면 현관문을 나서야 하는 그 순간까지 옷에는 관심이 없다. 계속 언질을 주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분 단위로 얘기해 주어야 한다. 마지막 순간에 촉박한 걸 본인이 느껴야 움직이는 아이다. 반면에 싫은 게 그다지 많지 않다. 저것도 괜찮고, 이것도 괜찮다. 그래서 부모인 내가 내 '마음대로' 해주는 게 더 쉬운 아이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과연 이 아이들에게도 좋은 것을까.. 끊임없이 생각한다. 

지금이야 엄마의 말을 잘 들어주지만, 이제 조금만 지나면 더욱더 '끌고 가기'가 어려울 것이고 그게 당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가 아닌, 아이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부모인 내가 돕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래서 고민한다.

아이들을 '가스라이팅'하고 싶지 않은 엄마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말이다.



두 아이 성향이 다르니 첫째를 키웠다고 둘째의 육아가 쉬울 리가 없다. 뭐든 다시 처음이고 또 새롭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첫째는 처음이어서 아이와 함께 나도 떨리고 어려웠다면, 둘째는 처음이지만 조금 더 내려놓는다. 그냥 포기할 건 포기하고 귀염 필터를 장착하고 바라본다. 이러니 다자녀 부부들이 셋을 낳고 넷을 낳는 건가 싶다(아이들은 그저 사랑이다!).


'결핍'


나는 결핍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은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더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고 우러러본다. 하지만 과연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항상 행복할까. 아니 그런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겠다. 가지려고 노력할수록 점점 더 공허해지는 것이 삶이 아닐까 그런 생각은 든다.


아이들을 육아할 때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좋은 것들을 제공해 주고, 환경의 세팅을 완벽하게 해 준다고 해도 분명 아이들은 목마름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해주려고 하는 엄마인 반면에 구멍 숭숭 엄마다.

아예 아이들에게 맡기는 '쿨'한 엄마도 못되고 그저 내 손으로 뭐든 해주려고 하는 '전전긍긍' 엄마이지만, 문제는 엉성하다. 완벽하게 챙겨주질 못하고 계속 뭔가 흘리고 부족하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지난 금요일부터 비가 오더니 기온이 부쩍 낮아져서 오늘도 날씨가 쌀쌀하길래, 오늘 아침 등굣길에 첫째 입히려고 얇은 바람막이 잠바를 한쪽에 챙겨 놓았다. 그런데 아이들과 급히 나온다고 잠바를 집에 두고 나오는 바람에 첫째는 반팔 차림으로 쌀쌀한 등굣길을 걸어갔다.

 

그렇게 아이들 학교와 유치원을 보내놓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계속 긴 팔 입은 사람들만 보이는 거다. 우리 첫째만 반팔 입고 춥지 않을까 싶어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해주려면 좀 완벽하게 잘 챙겨주든가 말이야. 너는 매번 안쓰럽고 짠하게 키우는 것이냐.' 

나 스스로에게 그리 말해주면서 돌아오는데, 한편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구멍 숭숭 엄마를 둔 아이들이 혹시 구멍 숭숭으로 '숨 쉴 구멍'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해야 할 것이 많은 이 세상에서 엄마의 어리바리함은 어쩌면 아이들에게 더 좋은 쉼의 공간이 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되지는 않을까. 


어떤 것이 더 좋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자책하지 말고 아이에게 정말로 좋은 것, 아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부모가 되고 싶다.


그렇게 아이들이 자라 간다. 아이들과 함께 엄마인 나도 한 뼘 더 자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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