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밥 한 그릇 : "배부름이 외로움을 줄일 수 있다."
배부름이 외로움을 줄일 수 있다
2004년 묶어낸 윤성희의 소설집 『거기, 당신』은 여러모로 하성란의 소설과 닮았다.
먼저 도시의 외로운 남녀들이 등장한다는 점, 이를 절제된 문장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 인물의 감정 표출이 드물고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위주로 표현하는 점, 인물의 이름이 없이 여자와 남자로 칭하거나 W, P, Q 등 익명으로 불리는 것 등을 열거할 수 있다.
또 음식 모형을 만드는 여자, 시청 공원 녹지과에서 일하다가 공원에서 자전거 대여점을 하는 남자, 도서관 사서, 작은 분식집주인 여자, 존재감이 없어 자꾸 부딪히는 여자 등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하성란의 인물이 실리적 인물들에게 무시당하거나 밀려나기도 하는 데 비해, 윤성희의 인물은 자신과 비슷한 자들을 만나 교감을 나눈다는 점이다.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하고 놀기도 하며 사업도 구상한다. 홀로 식물을 기르거나 나뭇잎에 편지를 써서 날리는 것으로 외로움을 견디고 있는 하성란의 인물들에 비해 행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외로운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음식을 먹고 포만감을 느끼는 것이 단순히 육체적 허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므로.
“배부름이 외로움을 줄일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배가 부르다고 생각하니 쓸쓸하다는 생각은 조금씩 멀어"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Q는 사이다를 마시고는 트림을 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트림을 해본 적이 없다고 내가 말하자 Q는 마시던 사이다를 주면서 말했다. 마셔요. 그리고 한번 해보세요. 나는 사이다를 남김없이 마시고 아주 길게 트림을 했다. 앞자리에 앉은 남자가 뒤돌아보았다. 시원했다. 나는 Q와 친구가 되었다.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중에서
식당여자가 수제비를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수제비는 커다란 냉면 그릇에 국물이 넘칠 정도로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수제비를 먹기 시작했다. 따뜻한 국물이 몸속으로 퍼져나갔다. "며칠은 굶은 사람 같아요." 고개를 숙이고 수제비를 먹는 그녀에게 식당여자가 말했다.
<봉자네 분식집>중에서
첫 예문은 서울 부산 간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나는 두 사람이 친구가 되는 장면이다. 사이다를 마신 후 다른 사람 눈치 안 보며 트림을 시원하게 함으로써 공감대가 형성되고 친구가 된다.
둘째 예문은 마음을 주고받던 P의 실종으로 불안한 '그녀'가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따뜻한 음식으로 원기를 찾고 식당 주인과의 인연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이 외에도 함께 음식을 나누고 배부르게 먹는 장면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모두 외로움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들이 친구가 되는 공간은 기차 안, 작은 식당, 찜질방, 작은 도서관 등 다양한데, 그중 찜질방은 친구를 만날 뿐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주요 공간으로 등장한다.
나는 찜질방에서 지냈다. 한 달 치 목욕비를 한꺼번에 끊으면 20퍼센트를 할인해 주었다. 매일매일 목욕을 했더니 잠이 잘 왔다. 개인 사물함에 들어가지 못하는 물건들을 보면 아예 욕심이 생기질 않았다. 최신식 가전제품을 보아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예쁜 옷을 보아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중에서
먹고 자고 씻고 친구도 만나고 게임도 할 수 있어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 없는 이 공간은 사치품이 필요 없으므로 소비를 부추기는 삶과 반대 지점에 놓인다. 게임을 해서 돈을 가장 많이 딴 사람이 미역국을 사고, 먹고 나서는 "늘어지게 잠을 자고, 밖의 날씨가 어떤지" 상관없는 이들의 삶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의 향기
를 풍기고 있다.
이들을 힘겹게 만드는 것은 이해받지 못하는 것과 외로움이다.
대체로 어릴 때 부모가 떠났거나 소통 부재(<거기 당신>), 어린 딸의 죽음과 아버지의 강요(<봉자네 분식집>), 이기적인 가족(<누군가 문을 두드리다>)들로 인한 상처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 앞에서는 침묵으로 닫혔던 입술이 열리고 웃음소리와 노래가 흘러나오게 된다. 특히 그 사이에 음식이 놓이면 따뜻한 기운이 가득해진다.
그의 허리를 꽉 잡고, 그녀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여덟 달 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등에 귀를 대보았다. 난 당신의 말을 믿어요. 그의 몸속에서 그런 말들이 들려왔다.
<거기, 당신?> 중에서
그녀는 카운터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구부정한 등들은 그녀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밥을 먹는 동안은 많은 것들이 잊혀졌다. 부엌에서 봉자엄마가 노래를 불렀다.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그 노랫소리가 익숙한 단골손님들은 밥을 먹으면서 속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봉자네 분식집> 중에서
'세상에 내 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온 <거기, 당신?>의 그에게 그녀가 다가왔을 때, 웃음과 따뜻한 온기가 이들 사이에 가득해진다. 별거 아닌 말을 하면서도 웃고(“두 가게가 헷갈려서 버스에서 잘 못 내릴 때도 있었어요. 하하……") 그녀가 성냥 모형을 건넸을 때도 웃는다("어! 고마워요, 하하. 정말 마음에 들어요.") 고독한 이들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끝 장면은 행복함이 온몸 가득 천천히 차오르는 느낌을 준다.
둘째 예문 역시 상실감이 컸던 두 인물이 함께 하며 행복을 느끼는 장면이다. 어린 딸을 잃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봉자 엄마, 그리고 마음을 나누던 P의 죽음으로 상실감이 큰 화자가 함께 식당을 하면서 “많은 것들이 잊혀”지고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밥을 먹는 사람들과 음식 만드는 사람,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 모두 따뜻한 밥 한 그릇처럼 정겨운 이 장면은 밥이 주는 힘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