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두드리는 목소리 : 함께 상상해 보실래요?
모든 것은 바로 눈앞에 있다. 우리는 손만 뻗으면 된다.
위풍당당하게 솟아오른 고층 빌딩과 아파트, 현란한 영상으로 시선을 모으는 광고판, 화려한 쇼윈도, 수많은 사람들과 자동차……. 거리에서 쉽게 마주치는 풍경들이다. 걸어 다닐 때나 자동차 안에 있을 때라도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든 뉴스든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선명하고 실감 나는 영상을 위해 끊임없이 기술을 개발한 덕에 우리는 실제보다 더 선명한 영상을 매일 접하고 있다. 배우 얼굴의 잔주름까지도 다 드러나는 고화질의 화면 앞에서, 기술 발달에 감탄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예전이 인간적이었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미세한 부분까지 낱낱이 드러나는 선명한 영상 앞에서 우리는 주어진 화면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시각 외의 지각 기능들이 축소되고 나만의 상상을 펼칠 여지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각 이미지가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고 권하는 소설이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적으며,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상상해 보는 것으로 더 잘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소설, 눈을 감고 캄캄한 어둠 속에 놓일 때 상상력이 가동되므로 오히려 더 잘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소설이다.
2000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중혁은 <무용지물 박물관>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펭귄뉴스>>에 수록)와 같은 소설들을 통해, 현시대에 와서 낯설게 된 이전 삶의 방식을 불러낸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라디오를 좋아하는 인물, 해안선 지도를 그릴 때 눈을 감고 파도 소리를 듣는다는 에스키모의 이야기를 통해 청작과 촉각, 상상력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보여 주고 있다.
<무용지물 박물관>의 화자인 ‘나’는 ‘레스몰’이라는 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는 디자이너이다.
‘레스몰’은 less와 small을 합한 글자로 ‘작은 디자인, 적은 디자인’을 지향한다는 것을 뜻하는 이름이다. 디자인이든 삶이든 ‘압축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과제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나’에게 어느 날 한 남자가 라디오 디자인을 의뢰하러 온다. 얼굴의 3분의 2가 수염으로 덮여 있어 첫인상은 좋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끌려서 ‘나’는 라디오 디자인을 맡기로 한다.
그의 목소리는 내가 들었던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저음이었는데, 너무나 낮아서 목에다 어떤 장치를 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의 목소리는 사람의 귀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파고들어 귀에까지 이르는 것 같았다. 메이비의 목소리는 피처럼 온몸을 통과해 심장으로 전달된 후 마음의 밑바닥을 돌멩이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주는 위압감이 상당해서 ‘나’는 요약을 중시하는 평소 소신과 달리 온갖 이야기들을 펼쳐 놓는다. “너저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나열하는 건 정말 비경제적인 짓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말과는 다르게 압축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계속 늘어놓게 된 것이다.
라디오 디자인을 완성하는 동안 나이가 비슷한 두 사람은 친구가 되는데, 인상이나 목소리 못지않게 독특한 메이비의 성향이 드러난다. 이는 곧 라디오를 믿고 좋아한다는 점이다. 메이비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라디오에서 자원봉사로 디제이를 하고 있으므로 삶의 중심이 라디오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어서 좋아하는 야구 경기도 라디오를 통해 듣는다. 그런데 텔레비전으로 본 자신보다 훨씬 생생하고 정확하게 설명하여 ‘나’를 놀라게 한다.
메이비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그 경기를 보는 동안 무엇인가 놓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텔레비전으로 본 것은 어쩌면, 메이비가 라디오로 들은 소리들을 뒤늦게 영상으로 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메이비가 설명한 경기의 그 순간들이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그때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메이비의 이야기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나’가 2분 안에 끝낸 이야기를 20분 넘게 설명하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야구장에서 불어오던 바람의 느낌, 긴장한 선수들의 몸동작, 파란 하늘 속으로 날아가는 하얀 야구공…….’
메이비가 묘사한 것들은 야구 경기의 승패를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에게는 ‘쓸모없는 것’이고 불필요한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승패와 상관없이 경기 자체를 즐기고 그 순간의 느낌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하며, 따라서 듣는 자에게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이야기는 생기 넘치고 실감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메이비의 이야기가 갖는 또 다른 힘은 상상력이다.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인 ‘메이비의 무용지물 박물관’은 매회 하나의 사물을 정해 묘사해 주는 코너가 있다. 잠수함, 버스, 수도원, 공항, 캠코더 등 다양한 사물 혹은 공간들을 시각 외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설명해 준다.
‘나’ 역시 시각장애인들처럼 눈을 감고 메이비의 목소리를 듣는다. 눈이 떠지려는 것을 억누르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 메이비가 설명하는 사물을 그려 보려고 노력한다. 설명을 들으며 상상하다 보면 그 사물들이 ‘움직이지 않는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물’ 같은 느낌을 받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봤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이유는 상상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보다 눈을 감고 상상력을 작동시킬 때 더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으며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생각보다 적다고 말해 주는 메이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오감을 일깨우는 것이 시각만이 아님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은 아주 적은 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눈은 말이죠, 느낌을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미묘한 색을 아주 단순하게 축소해서 본대요.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에서도 작가는 상상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에스키모들의 해안선 지도는 종이에 그린 평면적인 형태가 아니라 굴곡이 만져지는 나무로 된 입체적인 것이다. 이 지도를 만들 때 그들은 먼저 눈을 감고 해변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총동원하여 지도를 만드는데, 항공사진으로 제작한 지도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는 것이다.
소리와 기억으로 지도를 만든 만큼 이 지도를 읽을 때 역시 상상력을 가동해야 한다.
곧 ‘눈으로 보는 지도’가 아니라 ‘상상하는 지도’인 것이다. "손가락을 나무 지도의 틈새에 넣은 다음 그 굴곡을 느껴야" 하며 그다음에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해안선의 굴곡을 상상해야 한다. 결국 "촉각과 상상력이 완벽하게 일치해야만"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순간의 느낌을 생생하게 살리고 상상력을 가동시키는 메이비의 묘사는 보르헤스의 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틀뢴’이란 상상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곳의 언어에는 명사가 없고 형용사만 있다. 예를 들어 ‘달’이란 명사 대신 "어둡고 둥근 그 위의 투명한"이라고 하거나 "하늘 위의 옅은 색 오렌지 같은"이라고 표현한다. 즉 ‘달’에 대한 표현은 말하는 사람과 처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일상 언어가 사물이나 감정의 개별적 성격을 일반화시켜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때, 어떤 순간의 미묘한 감정이나 체험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적 언어라 할 수 있겠다. 형용사들로 이루어진 틀뢴의 언어나 야구장에 불어오는 바람, 하늘로 날아가는 야구공에 대한 묘사들은 그 순간 느끼는 구체적 정서를 살리는 언어이다.
중요한 사건들만 추려서 요약할 경우 간과하기 쉬운 이 요소들은 ‘너저분한’ 것일 수 있으나 순간의 개별적 정서가 살아있어 교감이 가능한 풍요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나’가 놓친 것이며 메이비가 지닌 재주, 곧 ‘연금술사처럼 평범한 것들을 무엇인가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재주’ 일 것이다.
휘황한 광고판들과 다양한 영상들, 현란한 네온사인이 일상화된 도시에서 눈을 감고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라디오를 믿고 사랑하는 메이비처럼 언제부터인가 뒷전으로 밀어 놓은 라디오를 꺼내 다시 귀를 기울여 보고 싶고, 가끔은 눈을 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음미하고 싶은 마음이 싹트는 것을 느끼게 된다. 혹은 에스키모들처럼 촉각과 기억을 동원해 만들었다는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보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기도 하고.
지금 잠시 눈을 감고 나만의 느낌을 음미하면서 무언가 마음을 울리는 그림을 상상해 보자.
메이비의 방송 사이트에서 페이지 가장 아래쪽에 있는 다음 구절을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