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탕의 시간>을 읽고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글 중에 ‘기억하는 나무’에 대한 시가 있다.
여인들이 각자 나뭇잎을 하나씩 귓가에 대고 가만히 바스러트리자 나무의 기억이 열린다.
“한 여인은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을 느꼈다./ 다른 여인은 나뭇가지가 부드럽게 흔들리는 소리를,.. (중략)... 또 다른 여인은 목소리들의 메아리를,/ 그리고 마지막 여인은 느린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김철희의 <모탕의 시간>은 모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찬바람에 온몸을 내맡기고, 날을 세워 내리치는 도끼질에 쓰러져가는 소리를 묵묵히 받아내는 일을 아픔이라 여겨본 적이 없다”라고, “주어진 소임이 그러하거늘 어디에 대고 하소연할 곳도 없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아마도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줬을 모탕의 이야기는 인간의 생활에 ‘유용한 자재’로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도끼가 표면을 찍고 곡식 가마니가 켜켜이 무겁게 얹혀도 묵묵히 감내해 온 일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찬바람’ ‘충격’ ‘고달픈 삶’, ‘우여곡절’ 등으로 표현하면서, 이를 ‘사명감’과 ‘짊어진 숙명’ ‘주어진 소임’으로 여겨 “묵언으로 다 받아내고” ‘묵언정진의 자세’로 버텨내는 모탕을 “경이롭다”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모탕의 일생은 작가가 지나온 시간과 중첩된다.
그래서 모탕과 작가는 한 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는 주어가 작가인지 모탕인지 모호한 문장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고되고 힘든 삶을 살아오면서 체득하는 자괴감’에 낙오되기도 했지만, ‘좌절을 소주로 달래며 실오라기 희망이라도 잡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온 여정’, 또 “견뎌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며 가난의 먼지를 털기 위해 쪽잠으로 버텨온” 시간은 ‘도끼가 표면을 찍어 홈이 파이는 우여곡절’을 겪어온 모탕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고달파도 주어진 소임을 사명감으로 묵묵히 감내하는 모탕처럼, ‘잉걸불로 남은 희망’에 기대어 고된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리라.
그러므로 ‘가장 볼품없는 취급을 당하면서도 스러져가는 순간까지 제 운명을 모두 바치는 모탕의 일생’은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다.
묵묵히 견뎌온 나날 끝에 평화로운 시간을 맞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삶이야말로 진정 숭고하고 아름다운 삶이므로.
그리하여 이 글은 “가장 낮은 곳에서” ‘볼품없는 취급’을 당하며 ‘만신창이 몰골’일지라도 주어진 소임을 다하며 정진하는 수많은 모탕들의 경이로운 삶에 바치는 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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