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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Aug 06. 2024

엄정하고도 아름다운

김애자 <하현달 아래서>를 읽고 


작가의 시선은 대상의 정수(精髓), 곧 핵심에 가 닿아야 한다. 동시에 그를 가로지르며 그 너머를 향해야 한다. 

이때 상상력은 빛나는 날개를 펴고 연결될 것 같지 않은 두 대상 사이의 유사성을 찾아내어 새로운 의미로 탄생시킨다. 

 

 김애자의 <하현달 아래서>는 노년의 시간을 ‘하현달 아래’라는 아름다운 공간적 이미지로 전이시켜, 달관에 이른 노년 풍경을 완성한다. 


“그이는 하현달 아래서 생의 층계를 내려가고 있다.” 첫 문장은 하현달의 희미한 빛 아래 생의 층계를 내려가고 있는 그이의 이미지를 통해 몽환적인 장면을 그려낸다. 

인생의 밤에 접어들었으나 달빛이 감싸고 있으므로, 밤과 ‘하현달’ ‘아래’ ‘내려가다”로 중첩된 하강의 강도가 묽어진다. 


이 느낌은 이어지는 문장 “천천히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가고 있다.”에서 확고해진다. 내려가고 있지만 서글프지 않고, 억울함이나 미련, 노욕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무들이 열매와 잎을 땅으로 내려보내듯, 다 털어내 가벼워진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몸에 배기까지엔 성실하게 살아온 80년의 시간이 존재한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30년간의 직장생활을 충실히 마쳤고,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난 지 2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무방한 세월이 그를 달관”시켜 ‘굴곡 없는 수평적인 일상의 연속’ 속에서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차이란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알며, ‘현재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원하지 않으면 평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가벼움이 ‘안분지족이란 둥우리’와 ‘삶의 여백’을 안겨주었음을 인식한다. 




두 사람은 ‘가장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사이’로 서로에게 ‘눈부처’이므로, 남편의 행동과 생각은 작가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고 있어 핵심을 비껴가지 않는다. 


그가 방 청소를 하며 대학시절 친구들과 부르던 <메기의 추억>을 흥얼거리는 모습에서 그의 젊은 날을 상상하는 한편으로 시간이 지나면 그리움으로 포장된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 데서 잘 드러난다. 

“골머리를 앓게 했던 사건들마저도 그리움으로 윤색된다.” “사소한 것들조차 그리움의 너울을 쓰고” 다가온다는 문장은 이런 시선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로써 이 글은 성실하되 엄정한 삶의 태도에서 우러나올 때 아름다운 비유와 이미지는 장식이 아니라 삶과 글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마지막 문장을 “마음 내키는 대로 인생의 뜰을 거니는 천진한 지구의 소요인(逍遙人)이다.”로 첫 문장을 변주함으로써, 공자의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慾 不踰矩)’에 이른 노년을 제시하는 동시에 수미상관 구조로 원숙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 <데일리한국>  2024. 8.5 게재 (작품 원문 포함)

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3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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