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SPAPA Jun 10. 2023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T

T 선배는 오랫동안 사내 교육 담당자였다.

가끔씩 의무적인 교육과정에 참석할 때면 그와 조우할 수 있었는데,

깔끔한 그의 헤어스타일과 복장, 그리고 한결같이 밝고 친절한 미소가 참 인상적이었다.

교육시설이 본사와는 떨어져 위치해 있기에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사내행사나 교육과정이 있어 방문하게 될 때면 그는 늘 본인 담당업무인지와 관계없이 방문한 직원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나중에 친분이 생겼을 때 직접 듣게 된 그의 이력.

인문학도였던 그는 전공과는 전혀 다른 자영업을 하다가 뒤늦게 고객서비스 관련 부서에 인턴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로서는 입사가 늦은 나이였지만 인턴생활을 잘 마치고 회사의 정직원이 되었고,

몇 년이 지났을 때 사내 교육 관련 부서에서 근무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로 교육 담당자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외부 고객이든 내부 고객이든 친절하고 밝게 잘 대응했을 그였을 것이고, 회사의 인선도 훌륭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그를 마주치는 기회 더 많아졌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사적인 자리는 가져본 적 없는 사이였다.

사내연수나 행사가 아니고서야 업무상으로도 교류할 일이 없었기에 오랜만에 보게 될 때 반갑게 인사할 뿐이었다.

였기에 특별히 반갑게 대했을 것도 아니는 것도, 모든 다른 직원들에게도 친절하고 반갑게 대응했을 그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다 그와 가까워지게 되는 아주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

2018년 가을.

우리 내외에게 찾아와 준 딸아이와 첫 해외여행지인 으로 태교여행을 갔다. 

여행일정의 반은 한국인들이 많이 투숙하는 호텔로 잡았었는데, 때마침 아내와 어린 딸과 가족여행 와있던 그를 만나게 되었다.

타지에서 만나게 된 인연이 무척이나 반가웠고,  그 또한 특유의 밝은 응대로 격렬한 반응을 해줬다.

시간 되면 일정 마치고 10시 이후 로비에서 맥주 한 잔 하자고 얘기를 나눴다.

 

외부에서 오후 일정과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저녁 시간.

먼저 자고 있겠다는 아내의 허락까지 받은 후 시간이 되는지 카톡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아내가 잠든 후에도 한참 동안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고 답도 없었다.

휴대전화 전원이 없어 꺼졌거나 고장이 났겠거니 만지작하다가 나도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카톡을 보니 그에게 꽤 늦은 시간 답장이 와 있었다.

딸아이를 재우다 본인도 잠이 들어 버렸다고.

미안하고 정말로 아쉽다고.


지금의 우리 딸 나이였던 당시 그의 딸.

나도 딸아이를 재우다 내가 먼저 마법처럼 잠드는 놀라운 경험을 되풀이하고 있기에,

당시 그의 말이 핑계가 아닌 진심이었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괌에서의 일정이 한참 남아있었으나 그는 공항으로 가야 하는 마지막 날이었기에 잘 귀국하고 한국에서 보자는 기약 없는 기약의 답장을 하고 카톡 대화를 마무리했다.


Guam @Pixabay




다시 만나게 될 인연이었을까.

조식 후 호텔 앞 산책할 겸 아내와 나간 호텔 앞 해변에서 여행이 끝나가는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그와 그의 가족들을 마주치게 되었다.

다시 한번 어젯밤 맥주 한 잔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과 이렇게라도 다시 만난 반가움을 격렬하게 나누며,

한국에 돌아가서는 꼭 다시 만나기로 한번 더 얘기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늘 그렇듯 '밥 한번 먹자'는 약속을 지키기란 쉽지 않았다.

사내 교육이나 행사로 그를 보게 될 때면 예전보다 더 서로 반갑게 '꼭 한 번은 봐야 한다'는 교감의 농도는 짙어져 갔지만 떨어져 있는 근무지와 거주지를 표면적 이유삼아 어느 한쪽도 쉽게 구체적 날짜를 잡아보자는 제안을 해볼 수 없었다.

내가 어린 딸아이가 있어 본인의 경험상 먼저 제안을 하기는 어려웠다는, 훗날 듣게 된 그의 입장.

딸아이보다 어린 자녀들을 키우고 있는 지인들을 볼 때면  또한 거짓이 아니었음을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된다.


그러다 또다시 그와 더 가까워지는 이벤트가 생겼다.

코로나가 시작하던 해,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로 공석이 많아진 본사 홍보부서에서 그에게 이동 제안을 했던 것이다.

외부에서 경력사원 한 명과 내부에서는 그가 충원되었다.

조직관리 차원에서 새로운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는 그보다 나은 후보자가 없었으리라 싶다.

HRDer로서의 직무 커리어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늦은 나이에 채용해 준 회사에 대한 애정과, 회사 안에서의 성장을 추구했던 그 역시 고심 끝에 그 제안을 수용했다 한다.




그렇게 본사로 오게 된 그와 점심 약속을 잡았고 미뤄왔던 만남의 시간이 늘어갔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같이 점심을 먹고, 분기에 한번 정도는 저녁 약속을 잡곤 했다. 못다 한 맥주 한 잔이 였는지 만날 때마다  잔이 아니라 캠핑용 대용량 한 통  거나하게 마시곤 했다.

서로 회사와 가정생활로 바빠 자주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돌아보면 그와 함께한 술자리는 항상 즐겁고 유쾌한 기억이다.


그가 본사로 온 다음 해 겨울 암울한 술자리가 딱 한번 있었다.

한참 전에 날짜를 잡은 약속이었지만 하필 예상치 못한 이른 진급 발표가 약속날짜 직전에 났던 때다. 

즐거운 연말연시 모임이 아닌 그의 진급 누락 위로주를 나누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부서에 다른 승진 대상자가 많아 큰 기대는 안 했다고 했지만 상실감이  보였다.

만약 그가 교육 담당부서에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그의 진급이 달라졌을까?

하지만 난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에는 그가 정말 잘 될 거라 생각했었기에, 더 잘되기 위해 잠시 쉬어가는 과정일 거라고 어쭙잖지만 조심스러운 위로를 취기에 건넸었다.


그는 예상대로 해당 직무에서도 점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1년의 기다림 끝에 그다음 해 진급을 했다.

만날 때마다 술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정말로 고마웠다는 얘기를 했다.

진급에 떨어졌을 때 본인의 상실감을 들어주고 진심으로 위로해 줬었다고.

아무리 돌이켜봐도 내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의 경청과 위로를 해준 건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기억이 뭔가 취기에 왜곡되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고맙게도 그는 나를 더 가깝게 여겨주고 찾아줬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그가 결국 잘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믿음이 고마웠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올해부터 여러 가지 다짐의 일환으로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

올해 초 그가 몇 차례 신년모임을 언제 할지 약속타진을 왔지만 느닷없이 술을 안 먹는다고 말하기가 뭐해서 간단히 점심시간에 만나는 걸로 안부를 전하곤 했다.

그러다 1분기가 지나기 전에는 꼭 한번 보자는 말에 저녁자리를 자주 함께하던 멤버 S군의 생일을 축하할 겸 모이게 되었다.


술은 마시지 않겠다는 선포에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 저녁식사를 하며 또 다른 유쾌한 시간을 보내다 장소를 옮겼을 때였다.

다음날이 휴일이라서 그랬는지 최근에 큰 업무를 마무리 짓고 홀가분해서 그랬는지, 그날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던 그는 빠르게 잔을 비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만취한 그가 갑자기 눈물을 그렁거리며 본인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나에게 말했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좋아하던 술도 안 먹고. 난 네가 얼마나 힘들지 마음이 아파."


맨 정신에 그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첫째는 나의 변화를 향한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을 뿐 극단적으로 힘든 상황은 아니었고,

는 내가 그렇게까지 술 자체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렇게까지 감정을 꺼내놓는 그의 모습을 처음 봤다.

물론 예전에는 똑같이 취해 있던 나의 기억도 왜곡되어 있을 수 있겠지만,

지난겨울 그 위로하는 자리에서도 상실감을 삼키며 담담했었던 그였기 때문이었다.




만취했던 그는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날 이후 그를 더 가깝게 느끼고 있다.

나에게 보여준 그의 감정이 오롯이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감수성이 풍부한 그에게 금주를 인내하고 있는 나의 고충이 증폭되어 전해졌을 수도 있고,

평소와 달리 본인과 술을 안 마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는 다른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내게 꺼내놓은 호의만큼은 순도 100%였던 것은 확실하다.


지난달 둘이서 오붓하게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그가 나에게 제안했다.

내가 언젠가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하는 날이 오면 근처 바닷가로 놀러 가 좋아하는 해산물을 안주삼아 밤새도록 술 마시며 얘기를 나눠보자고.

물론 난 그 제안에 흔쾌히, 그리고 격렬히 응했다.

언제가 되었든 난 그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다.

회사 내외부에서 시도 중인 나의 노력들이 가시화된 변화로 나타나 하루라도 빨리 그와 기쁨의 술잔을 다시 함께 기울여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을 보여주진 않겠지만, 그가 보여준 순수한 호의에 대해 답례의 인사를 전할 생각이다.


그날이 최대한 빨리 올 수 있도록 더 분발해야겠다.
이 글을 적으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이전 20화 신뢰할 수 있는 사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