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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PAPA Sep 30. 2023

긍정의 마음을 알려준 사람

G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

If I have lost confidence in myself,
I have the universe against me.

-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


"미안한데 ㄱ프로젝트 건 왜 아직 진행 안고 있냐고 급히 찾으시네.

지난번 보고 준비했던 자료 편집해서 핵심 이슈만 한 장으로 줄여주고, 향후 예상일정 진행 할 때와 안 할 때 두 가지 버전으로 3시까지 준비해 줄래?"

"네? 오늘 3시까지요?"

"응응. 기존 자료 있으니까 다른 일 잠시 미루고 직원들과 먼저 챙겨줘."

"네....."


얼굴이 붉어지고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아 눈을 피해 고개를 아래로 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진즉에 방향성 수립을 위한 보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이라 몇 주 전부터 챙겼던 일이었다.

우선순위 현안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속적 요청에도 아무 피드백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위에서 거론'했기에 점심시간을 앞두고 퇴근 전 보고를 위해 수면 위로 급부상한 것이다.

상부의 지시와 우선순위에 맞춰 제한 시간 내 하달 과제를 정확히 수행하는 게 회사원의 역할임은 알고 있다.

그래도 부서장 G에 대한 불만이 마음 한 구석에서 용솟음치는 것을 가라앉히기 쉽지 않았다.




"같이 일하다 보면 엄청 답답할 거야. 원래 평소에도 결정장애 심해.

그래도 그만큼 다른 사람들한테 양보하며 배려해 주는 사람도 드물어. 좋은 누님이니까 잘 챙겨."


나와도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G와도 가까운 X선배가 했던 말.

그녀가 내 부서장을 맡게 된다는 것이 공론화될 무렵 내게 해준 조언이었다.

'업무 추진력은 떨어지나, 대인관계 측면에서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는 그녀에 대한 비슷한 평판을 여러 차례 듣기도 했었기에 대충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었다.

더 솔직하게는 앞으로 그녀와의 부서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이 사실도 어느 정도 짐작었다.


서로 다른 부서에 있을 때 간단한 업무협조 시 그녀의 업무스타일에 대해  껴본 적이 있었다.

업무 추진을 위해 급하다고 요청 메일에 두 차례 회신을 했다.

추가적 문의를 해 온 다른 직원과도 이미 얘기가 되어서 정리가 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일주일도 넘게 지나 처리된 과제로 잊고 있을 무렵 그녀에게서 아주 밝은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다시 한번 상세히 설명해 줄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아니 어쩜 이렇게 잘 아니. 진짜 전문가다. 다음에 또 물어봐도 될까?"


특유의 밝고 높은 목소리로 누가 들어도 기분이 좋아질 칭찬과 더불어 도움을 구하는 그녀의 모습.

내용적으로는 뒤늦은 질의가 약간 황당하면서도 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끝난 통화의 기억.

돌이켜 보면 그때의 그녀도 현재의 그녀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나와 얼마나 업무적으로 자주 부딪히느냐의 정도 차이가 있었을 뿐.




몇 해 전 각자와 친분이 있었던 P나 X선배를 통해 모임에 초대받으며 그녀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전까지 부서의 접점이나 해외 재류의 기간이 묘하게 빗겨  수년 동안 얼굴조차 제대로 본 적 없는 사이였다.

자주 시간을 보내게 되니 그녀의 삶에 대해서도 직간접적으로 많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지금은 연로하신 아버지가 다른 큰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신 고위 임원셨다는 사실.

조금 늦은 나이에 만난 남편 또한 다른 큰 회사에서 장래를 촉망받는 요직에 있지만, 주중에 서로 얼굴도 못 볼 만큼 바쁘다고 했다.

아이를 정말 좋아하지만 아이를 갖기에는 늦어 이제 조카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회사 외부에 다양한 인맥이 있는 이유가 입사 전 다른 회사에도 몇 년 간 다녔고, 경영대학원까지 졸업해서라는 것도 친분이 생기고서야 알게 된 얘기였다.

@Pixabay


사실 그녀는 내게는 어떤 사람인지 악이 어려운 캐릭터였다.

아이가 없다고는 하지만 가정이 있는 사람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같이 술자리가 있었다.

사람과 술을 정말 좋아하는 것은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생각보다 술을 잘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여지없이 술에 취해 더 하이톤이 된 목소리로 본인을 먼저 보내지 말고 다 같이 술을 더 먹자고 하는 그녀.

일행들은 오늘은 또 어떻게 떼어내어 택시를 태우거나 집 근처에 내려 주고 들어갈지 고개를 저으며 서로 눈치를 보기도 했다.

취하면 혼자서 어딘가에 넘어지거나 부딪히는 일은 빈번했지만, 그렇다고 술에 취해 타인에게 과격한 언행으로 피해를 주는 모습은 한 번도 없이 늘 싱글 생글 표정이었다.


그녀가 술자리를 자주 갖는 사람들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도 의아한 부분이 많았다.

가령 서로 회사 내에서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앙숙인 철수와 영희가 있다고 할 때, 그녀는 철수와도 친하고 영희와도 친했다.

대개는 철수와 영희의 갈등의 정도 극단의 있는 경우 어느 한쪽에 더 가까워지게 되는데 그녀는 두루 가깝게 어울리는 성격이었다.

그래도 보통 나와 더 가까운 한쪽에 더 기울어지게 되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들도 있었다.

그녀를 지켜보면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과연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까?'라는 심오한 고민을 하기도 했었다.




"앞으로 더 잘 부탁해!"


작년 초, 그녀와 상하관계로 업무를 시작하고 처음 반년은 무난하고 평온하게 시간이 흘러갔었다.

직책은 없었지만 부서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 직무역량까지 출중한 선배도 있었고, 일당백을 맡아주는 후배 A도 함께였다.

나도 새로운 부서 업무에 대한 열정이 피어나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반년 뒤, 업무적으로는 사실상 부서장의 역할을 맡아주던  선배가 부서를 떠나며 위기가 시작됐다.

선배가 알게 모르게 짊어지고 있던 많은 하중이 위도 아래도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다.

조직에서 신뢰를 잃은 담당 임원 밑에서 새로 추진하는 업무들도 방향성을 잃고 추진력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첩첩산중으로 작년 여름 우리 부서원들을 말 그대로 전멸시킨 열병. COVID-19.


복합적인 악재 속에서 부서원들의 불만과 의욕 저하는 극도에 달했고 각자도생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작년 하반기는 나 스스로도 이유 모를 분노와 원망으로 부정적인 사념에 휩싸이던 시기였다.

나를 포함해 많은 부서원들의 화살이 담당 임원과 부서장 G를 향해 쏟아졌다.

그녀도 평소의 밝은 웃음과 목소리를 잃고 중간에서 많이 괴로워 보였지만, 중요한 진급을 앞두고 있었기에 그녀는 위도 아래도 모두 포기하지 못한 채 점점 더 야근과 술자리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알아서 척척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


시간이 지나 한 걸음 떨어져서 생각해 보면 그녀는 사소한 업무라도 완결이 된 것에는 늘 칭찬과 감사를 표현했다.

회사 내외부의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과 자리도 많이 마련해 주며 부서장으로서 그녀 나름의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그렇게 길고 긴 터널을 지나 작년 하반기가 지났다.

그녀도 당시 담당 임원이 추천권한을 가지고 있던 승진 TO의 한자리를 받게 되면서 새로운 한 해를 기분 좋게 맞이했다.

물론 그녀 혼자 성과를 가져갔다고 진급이 누락된 아래로부터 이야기가 나왔지만, 내가 볼 때는 그녀가 가장 큰 보상을 받아야 할 힘든 역할을 맡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죽을 만큼 노력하는 배우 김혜수 님]


하지만 새로운 한 해라고 즉 반전이 생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부서원 모두에게 업무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가장 큰 의지가 되었던 A도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또 몇 개월간의 지지부진하고 침체된 부서의 분위기 속에서 여전히 G와의 관계는 늘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내가 회사 내부에서의 업무나 관계 개선에 대한 열정과 애정보다는 가정이나 장래에 대한 다른 방향으로 에너지를 돌린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녀가 너무 사내에서 윗사람들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정치에만 신경 쓰고, 업무나 부서원들 관리에는 무심하고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가졌었다.


약 두 달 전.

우습게도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의 변화가 크게 온 것은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험담을 듣고 나서였다.

늦은 시간 탕비실에서 그녀와 친하다고 생각했던 옆 부서장 선배가 또 다른 부서의 직책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둘을 제외하고는 내가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갔다가 두고 온 물건이 있어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들려 인사를 하러 근처로 다가가다가 우리 부서와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어 멈춰 섰다.

어느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한 장면처럼 몇 걸음 떨어진 거리를 두고 서서 벽 뒤에 새어 나오는 이야기를 잠시 들었다.


거칠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옆 부서장 선배가 쏟아내는 불만의 핵심은 명확했다.

우리 부서장인 그녀가 윗사람들에게만 잘 보이려 노력하고, 부담되는 업무는 다른 부서로 넘기려고만 한다는 점이었다.

그녀와 친분이 두터운 윗선이 있을 때는 이 부분이 심해져 힘이 들다는 내용이었다.

약간 헛웃음이 나왔다.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라는 것이 정말 얼마나 가볍고 피상적인 것인지 생각했다.

그녀와 가깝고 비슷한 이해관계를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옆 부서장이 그렇게 말하니, 결국은 모두 자기중심적인 것이란 사실이 씁쓸하고 우스웠다.

인사를 하지 않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사무실을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도 안타까웠다.

무엇을 위해 그녀는 회사에서 이리저리 잘 보이겠다고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것일까.

같은 부서의 입장에서 그녀의 행동이 두둔되기도 했다.

전투력이 떨어져 있는 휘하의 대원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임무 분장에조금 더 안전한 쪽으로 선점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남의 입에서 부서장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라도 그녀를 조금 더 이해하고 존중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이 반컵이나 있네' VS '물이 반컵밖에 없네'

@Pixabay


긍정적인 마음가짐에 대해 강조할 때 너무 흔히 회자되는 비교 일화다.

실제로 나쁘게 생각하면 무슨 말이든 한없이 나쁘게 보이는 게 사실이다.

미우면 밥 먹을 때 젓가락질만 봐도 꼴 보기 싫다는 말도 있듯이, 의미 없는 말이나 행에 의미를 두게 되는 순간 스스로 더 부정적인 생각에 매몰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대하자 더 긍정적인 반응들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알아서 척척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


예전에는 말로 때우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칭찬이 정말 나를 신뢰하는 감사의 인사로 들렸다.

그녀의 긍정적인 모습들도 많이 보였다.

부산으로 당일치기 출장을 갔다 상경하는 길.

역사에서 무거운 캐리어를 에스컬레이터로 옮기지 못하고 계신 노부부를 보고 그녀는 도와달라며 앞서가던 나를 멀리서 불렀다.

기차 플랫폼 번호와 시간만을 보고 걸어가던 나에게 그녀의 행동은 인상적이었다.

설사 위선이었을지라도 그녀의 관심과 배려는 선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성향에 대해서도 정말 많은 이해를 해보려 노력해 보게 되었다. 

기본적인 성향이 나와 너무나 다른 것이 나의 스트레스 요소이자 갈등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대표적 MBTI의 한 부류로 따지면 극강의 J형인 나는 미리미리 계획하고, 그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 성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그때 상황의 변화에 잘 대응하면 된다는 것이 기본값으로 확실히 장착된 정반대의 P형이었다.

서로 다른 사람임을 받아들이고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하자 그녀가 하는 행동들도 하나둘 더 잘 이해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갑자기 닥쳐서 떨어지는 폭탄 같은 업무에는 한 사람으로 열불도 나지만 의연히 넘겨보려 하게 된다.




인자무적(仁者無敵)

대학교 졸업 무렵 한 후배로부터 들었던 할아버님의 교훈.

조직생활을 오래 하신 그분께서 늘 강조하신 얘기라고 했다.

그 의미를 지금의 나의 방식대로 해석해 본다.


스스로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열린 마음으로 아끼고 존중한다면,
결국 나 자신에게도 더 좋은 일들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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