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책. 암환자의 여행지 (1) 평창

몸은 약해도 집에서 나가고 싶다

by 경칩의목련

"언제쯤 여행가도 되나요?"

환우회 카페에 자주 올라오는 질문이다.

오랜 항암과 이식으로 병원에 갇혀있었던 환자들 대부분의 바람 1번은 김치/생과일 먹기이고, 2번은 여행가기이다.

이식 6개월쯤 지났을 때 연락하던 환우들이 다들 뜸해져서 무슨 일이 생겼나 했더니, 다들 여행을 갔던 거였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나 또한 가슴에 있는 히크만 카테터를 떼자마자 여행을 계획했다.


[아직은 면역이 약한 암환자가 갈 수 있는 여행지는 어떤 곳일까?]

1. 위생적으로 관리되며 온/습도가 일정히 조절되는 숙소

2.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곳

3. 분리되어 식사할 수 있는 곳

* 혹한기와 혹서기는 피할 것


[나의 여행준비물]

1. 처방약 + 비상약(해열제, 지사제, 일회용 소독솜, 밴드에이드)

2. 300ml 생수 여러병: 식당의 물통은 오랫동안 씻지 않은 경우가 많다.

3. 좌욕기

4. 크래커

5. 일회용 수저: 포장식사를 먹을 때를 대비

6. 여러 벌의 얇은 옷과 내의, 편안한 신발


나의 첫번째 여행지는 강원도 평창이었다.

평창은 새롭게 깔린 고속도로로 이동이 편리하고, 올림픽 덕분에 깨끗한 숙소들과 식당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의 설악산국립공원/속초시내/양양에 이어서 볼 수 있는 구경거리가 많았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오래 전에 본 드라마 [도깨비]의 명장면이 월정사 가로수길에서 촬영되었는데, 몇

년이고 바빠서 가지 못 했던 것이 병상에서 너무 후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후회되었던 것은 의외로 큰 평수의 집이나 승진이 아니라 드라마 촬영지였다.


여행 시기는 9월 중순, 평일이었다.

8월 여름 바캉스의 흥분이 가라앉고 모두가 직장과 학교로 돌아간 이 때가 내게는 가장 좋은 여행 시기였다.

평창 숙소는 평창 인터컨티넨탈 호텔.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평일을 선택하고 IHG 공식 앱을 통해 예약한 덕분에

평상 시의 1/3 비용으로 숙박할 수 있었다.


인터컨티넨탈.jpg

병원 입원 중에 호텔의 '계란 오믈렛'이 너무너무 먹고 싶었는다.

백혈병 환자에게는 반숙 계란도 감염우려로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로 감소한 숙박객 때문에 많은 호텔들이 평일 룸서비스를 중단했고

또 룸서비스를 하더라도 계란 오믈렛을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의외로 몇 곳이 없었다.

고마운 인터컨티넨탈만이 평일 아침 식사로 아름다운 오믈렛을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으로 숙박!

고맙습니다, 인터컨티넨탈!



평창1.jpg 감격의 전나무숲길 인증샷

버킷리스트 넘버 1, 월정사의 전나무숲길

계절탓인지 전나무숲길은 드라마에서의 모습과 상당히 거리가 있었고 낭만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병원을 나와서 이 곳을 왔다!'는 생각에 너무나 즐거웠다.


이어서 상원사를 들렀다.

그러나 월정사와 전나무 숲길에서 바람을 좀 쐬었더니 상원사에 들렀을 무렵에는 강한 오한이 들었다.

상원사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걸어올라가는 것도 꽤나 무리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법당에 앉아 쉬는데도 복통이 오고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119를 불러서 내려가야 하나 고민될 때쯔음 상원사 내 찻집을 발견하였다.

좀 더 마음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 곳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을텐데 어렴풋이 예뻤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그곳에서 몸을 녹이고 간신히 상원사 주차장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이렇게 첫 번째 여행은

'찬 실외에 오래 있으면 복통과 오한이 온다'

'걸어서 한참 올라가야 하는 곳은 피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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