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자꾸 늘어만 갔다.
책장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더는 들어가지 못한 책들이 바닥에 하나둘씩 쌓였다.
조금씩 위로, 위로.
그러다 문득, 책 더미가 말하는 것 같았다.
"아악 무너질 거 같아. 이제 그만 올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어쩌지.."
친구가 고민하는 나를 이케아에 끌고 갔다.
딱히 사고 싶은 건 없었고
무심히 매장을 돌다가
새하얀 6단 책장 앞에 멈춰 섰다.
"이거야! "
그렇게 우리는 책장을 들고 와 조립했다.
끙끙대며, 땀을 뻘뻘 흘리며.
새 책장이 생기고,
내 책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 순간 마음까지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일.
그건 생각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자주 거실 책상에 앉아
그 책장을 바라보곤 했다.
특히 한 칸.
내 손이 가장 잘 닿는 높이에,
유난히 즐겁게 읽었던 책들만 골라 담은 칸이 있었다.
그 칸에서 꺼낸 책은
언제든 나를 다시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
요즘 다시 그 칸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예전처럼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예전처럼 공감되지 않았다.
"내가 이 책을 왜 그렇게 좋아했더라?"
"이 사람, 생각보다 건조하구나."
그때의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저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읽었을 뿐이다.
책 제목이 좋았고 그들이 말하려는 주제가 좋았다.
확신 없는 삶 속에서
그들의 확신이 나를 붙잡아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글을 쓴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에게 보일 글을 쓴다.
고치고 다시 쓰고 또 고치면서
어떤 문장이 내 마음에 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 감정을 쏟지 않는 문장을 좋아한다.
그러나 마음이 분명히 담겨있는 문장.
마음을 다 꺼내놓지 않지만
그렇다고 감추지도 않는 문장.
감정을 정확히 찌르진 않지만
묘하게 오래 남는 문장.
정답 같진 않지만
묘하게 위로가 되는 문장.
그런 문장을 좋아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정답이 필요했지만
지금의 나는
답이 없다는 걸 받아들인다.
막연한 게,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이렇게 사람이 달라지는구나 싶다.
문득, 이슬아 작가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에 이름을 붙였다.
나도 해보기로 했다.
과거의 나는 '예나'
미래의 나는 '미나'
그리고 지금의 나는 '니나'
나는 예나를 기억하고
미나를 기대하는 니나다.
그리고 우리 셋은
분명히 서로 다른 사람이다.
예나가 좋아했던 책은
지금의 나에겐 맞지 않았다.
지금 내가 고른 책들도
미나에게는 안 맞을 수도 있다.
그것만 알면 충분할 것 같았다.
우린 다른 사람이라는 것.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이 순간만 니나로 살아갈 수 있네?
지금을 흘려보내지 말아야겠다.
지금의 나를 더 많이 살아내야겠다.
지금의 감정
지금의 문장
지금의 나
니나로서 더 가득 채워야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장을 보며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