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린 Jan 27. 2024

호주 도시살이 실패, 시골로 가게된 사연

저는 대실패예요

적게라도 벌면서 하루살이를 하곤 있었지만 이제 그마저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 일은 다 떨어졌고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언어적 난관과 좁은 시야로 인해 쉽지 않았다. 아직 농장이라는 찬스가 있다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수중에 단 돈 20만 원 정도가 남았었고 숱하게 뿌리는 이력서도 이제 지겨워진 상태였다.


맘 같지 않은 인터뷰와 트라이얼, 와중에 절대 가지 않겠다 목박은 한인식당. 이런 상황에서 이제 더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애초에 나는 도시보단 시골을 선호했으니까 1년 채우고 갈 농장을 조금 당긴다 생각했었다.(호주는 첫 비자는 1년이 나오며 두 번째 비자를 원할경우(연장을 원할경우) 농장에서 88일을 채워야 한다)

호주에 1년만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었기에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을 가야 했던 거라고, 생존문제로 인해 순서가 좀 바뀐 거라 생각했다.


농장은 우리가 생각한 대로 영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 몸뚱이 하나로 농작물을 따면 딴 만큼 돈 버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물론 농장 상황에 따라 그 값은 천차만별이겠지만 이 마저도 운이 필요하다지만 도시살이 와는 다른 것은 확실하다.


검트리(호주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도 농장 컨디션에 이야기가 많다 보니 신중해야 했다. 코스타라고 대형농장이 있는데 그곳은 들어가기가 힘들뿐더러 지금 시즌이 아니라니 애초에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검트리에서 괜찮은 공고를 보았고 연락을 했다. 논리는 없지만 내가 골랐다는 이유하나로 완전 운 좋게 구한 것이라는 비약을 갖게 되었다. 무조건 내가 고른 건 괜찮다! 지금 보면 기가차지만. 

당시 살고 있던 멜버른에서 기차로 8시간 정도를 가야 했다. 왠지 무서웠다. 호주 시골은 사람하나 없어져도 모른다던데. 갑자기 떠나게 된 나 때문에 한 집에 같이 사는 6명끼리는 광란의 밤을 보내었다. 온갖 와인과 술을 다 섞어마시는 바람에 우리는 보기 좋게 기차를 놓치게 되었다.(아! 시골은 나 혼자 가는 건데 룸메들이 중간까지 같이 와주겠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고맙다. 그때도 고마웠다) 중간지점까지 3시간을 갔었는데 다시 돌아왔다. 거대한 캐리어를 들고.


그날 밤 집에서는 짐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짐은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절대 혼자서는 지고 갈 수없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옷과 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다음 날, 그날은 오로지 나 혼자 가야 하는 날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한지 모를 일이지만 어찌어찌 도착했고 사이트에서 구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인 남자였다. 운이 좋게도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검증되지 않은 곳을 이렇게 찾아간 나도 참 대단하다 생각한다.


도착한 곳은 정말 쌩 시골이었다. 집도 구하기가 힘들어서 캠핑카처럼 생긴 오래된 카라반에서 살아야 했다. 상황이 어떻건 일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것도 상관없었다. 난 그 정도로 돈에, 생존에 목말라있었다. 하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 한국인은 사람을 모아 오면 수수료를 받는 형식이었는데 컨텍한 농장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하루는 포도농장에서 하루종일 포도잎을 솎으며 일을 했는데 시급이 천 원대였을 정도로 열악했고 또 하루는 농장일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이 아직 익지 않은 포도를 다 떨어뜨리는 바람에 잘린 적도 있었다.

하루살이도 못할 정도가 된 것이다. 


다시 그 한국인 컨트렉터를 따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히 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컨트렉터와 지인 1명 모두 남자였고 나 혼자 여자, 이렇게 셋이서 달리다가 곧 해체될 것 같은 차를 가지고 이틀 동안 이동했다. 하루는 10시간을 운전하고 가다 주유소에 차를 세우고 자고 다시 이동했다. (난 도대체 무얼 믿고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이동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하나였나 싶다)

그렇게 블루베리 시즌이 돌아온다는 지역으로 이동했고 집을 구했으며 이제 어찌어찌 정착한 느낌이 들었다. 그 지역은 농장으로 일하는 워홀러가 많은 지역이었다. 첫 셰어하우스에서는 14명이 바글바글 살았는데 나와 몇 명을 빼고는 다 코스타(대형농장)를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이탈리안 친구는 나보고 지금 다니는 농장을 나오고 코스타를 지원해 보라 했다. 지금 코스타는 사람을 뽑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형태는 그 한국인은 너로 돈을 벌고 있는 것이라며 코스타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고 상태도 훨씬 좋다고 했다. 하긴 이 한국인 컨트렉터를 따라온 지 2주 동안 돈을 벌긴커녕 매번 농장을 옮겨 다니기 바빴으니 코스타에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이탈리안 친구가 참 고마운 시점이었다.


생각보다는 아주 수월하게 코스타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간 일어난 경악할 일은 그 한국인 컨트렉터의 주 고객층은 일본인과 한국인이었는데 일본인들 방 보증금과 일한 돈을 떼먹었고 나도 그럴 뻔했지만 다행히 돈은 다 받은 상태였다.(얼마 되지도 않은 돈이지만) 총대를 메고 일본인 친구들 돈을 받아주려 했지만 자기는 다 돌려주었다며 서로 다른 말만 해댔다. 


쨌든 그 일본인 친구들도 나도 모두 코스타로 이동했고 그 한국인 컨트렉터는 다른 지역으로 사라졌다.(그때 이곳은 분명 상황이 더 좋다며 같이 가자는 말을 했었다. 무얼 믿고?) 이후에 코스타에서는 호주온 이후로 황금기를 보내었다. 워홀을 농장에서 보내는 것도 꽤 좋은 일이다. To be contin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