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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dhi kim May 09. 2022

석가모니 오신 날을 맞이하여...

자성의 재해석

석가모니 출현이 수천 년을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그만큼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해마다 맞이하는 이 날이 오면 늘 그 의미를 곱씹어 보곤 한다. 의미를 되새김한다는 것은 석가모니가 전한 메시지가 너무 심오해서 단번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매번 아니 시대에 따른 새로운 해석이 전해져야 하고 그런 역할은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 그의 가르침에 몸담고 있는 출가자 그리고 신심이 강한 신도들의 당연한 책임이자 의무이며 몫 이리라. 그래야만 붓다의 가르침이 계속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해석과 의미 부여가 지속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의 가르침이 그저 고전에나 남아있는 유물로 전락될 위기를 맞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이 세상에 나온 이유가 “우리 누구에게나 있는 자성(自性)을 일깨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말인 즉, ‘우리 모두 깨달음을 얻을 자질인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라’로 요약할 수 있겠다. 필자는 이 의미를 현대적인 용어로 ‘자존감을 높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자존감(自尊感) 은 스스로의 가치를 잘 알아 자신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이 소중한 만큼 다른 생명체도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도 외모나 재산, 경력, 소유물 등의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가 가진 존귀한 인격을 본다. 그런데 일상적으로는 결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매사에 상대가 가진 외적인 요소로 바라보는 바람에 진작 중요한 것은 놓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이래서 늘 매스컴에 오르내리게 되는 싸움과 투쟁으로, 더 나아가 끔찍한 사건들로 이어지기도 한다. 

필자 자신이 느끼는 자존감을 말로 표현하라면, ‘충만함’ 그 자체이다. 그냥 아무것도 필요 없는. 물론 누군가의 도움이나 함께 한다는 즐거움이 수반된다면 더 할 수 없이 좋지만 행여 그렇지 않더라도 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늘 유유자적하다고 할까. 그래서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올해는, 과연 내가 생각하는 자존감이 불교의 ‘자성’의 뜻과 상통하는 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자성(自性)이란 무엇인가? 인도 산스크리트어로는 ‘svabhāva’ 즉 스스로(sva) 존재함(bhāva, existing)의 뜻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존재(存在)란 감정 혹은 정서 그리고 심미적인 공감능력을 가진다. 이 가운데는 기쁨, 사랑, 슬픔, 분노, 용기, 두려움, 혐오, 놀람 그리고 금욕 같은 의미들이 다 들어 있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영적인 의미에서 존재란 “황홀감으로 완전하게 충전된 혹은 사랑과 헌신으로 마음이 완전하게 녹아들어 성스러운 존재와 하나 된 ”이란 의미로서 이렇게 충만되면 그 존재는 세속적인 나를 벗어난 큰 존재(Mahābhāva)가 된다. '큰 존재'는 웃고, 노래도 하며 춤추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인도에서 필자가 티베트에서 추앙받고 있다는 승려(린포체)의 설법이 열린다고 해서 간 적이 있다. 사람들은 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많이 모여 있었고 티베트어를 영어로 통역할 서양인이 옆에 있고, 생각과 달리 아주 젊어 보이는 린포체는 단상에 앉아 있었다. 기대에 가득 찬 대중들은 단상의 그를 향해 집중하는 고요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는 소리 내어 키득키득 웃어 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당시 필자가 30대 초반이었는데 오는 느낌은 “아, 이 사람은 정말 깨달았구나, 그런데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느끼고 있구나”. 그러면서 돌아오는 내내 그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으며 동시에, 그의 깨달음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깨달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다만 난 그가 깨달았다는 사실 하나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큰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큰 존재는 요가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신성과 하나가 된 것이요, 불교적인 설명으로는 깨달음의 정각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그 단계에 가면 나와 남이 구분이 안 되는, 그러니까 주관과 객관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버리는 단계라서 세상천지가 부처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공감능력이 뛰어난 상태인 것이다. 뛰어난 공감능력은 도저히 다른 사람의 아픔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된다. 부처와 보살이 그렇듯이.   

 

석가모니 붓다가 이 세상에 오신 뜻이 다른 의미로 우리 모두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라는 필자의 해석은 이쯤 되면 맞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국을 키워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 노력은 의지적으로 행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필연적으로는 뛰어난 공감능력에서 나온다. 공감 능력 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환경문제처럼 중요한 테마가 아닐 수 없다. 상대가 부처이기 때문에 절대로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여전히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상대를 평가하고 대하고 있지 않은가. 뛰어난 공감능력을 가지려면 모든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말로만 자성을 외치면서 여전히 그 속은 잔뜩 편견 속에 갇혀 있다면 그야말로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가 말이다. 종교라는 울타리, 국적의 다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분별심이라는 이름의 편견을 떨치지 못한다면 결코 불교에 몸담고 있다 할 지라도 자성을 깨우치는 일이야 말로 요원한 게 아닌가.  


    

이쯤 되면, “자성이 있음을 알라”는 가르침이 그냥 말하기 좋은 언사에 그치지 않게 하려면 너도 나도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서 공감능력이 탁월하고 나아가 자존감의 승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붓다의 가르침은 결코 불교인 만의 전유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의제로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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